이탈유발자들 9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내가 본 인간 엄흥도의 매력은
이 시대에 흔치 않은 '어른'이라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범죄도시>의 마석도도 좋은 형사이고,
<휴민트>의 조과장도 좋은 공무원이고,
<존윅>의 존윅도 정의롭지만...
코리안 컨츄리사이드 스타일 광천골 촌장에게서
요새 못보던 그리운 어른의 모습을 관찰했달까.
엄흥도는 가난하고 배곪는 광천골 촌장이다.
하루는 이웃 노루촌에 유배 온 양반 덕에 사람들 얼굴에
살이 토실토실 오른 걸 알고,
엄 촌장도 새로 유배온다는 양반 덕 좀 보자 싶었다.
그러니, 초반에 엄흥도는
양반 덕을 보려고 눈에 혈안이 된 촌장이다.
그 양반이 '어떤 나쁜 짓'을 해서 유배를 왔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백성 고혈빨기든, 성범죄, 뇌물이든 찝찝해도
다만 우리 배만 불려주면 그뿐!
그런데, 단종이 오고 난 뒤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한명회한테 보고가 제대로 안되면,
제 목숨, 아니 제 아들 목숨까지 거둬갈 판이다.
마을에 도움은 안되고 목숨은 내놔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아 소리라도 쳐본다...... 무야호!
그리고 마침내 촌장 엄흥도는
한명회에게 잘보여 자신의 아들과 촌사람들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단종을 지켜줄 지 딜레마에 빠진다.
처음엔 촌장으로서의 역할과 배부르게 사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선택을 했지만,
그는 어린 단종의 야윈 모습을 보며,
아무리 왕위와 정쟁이 중요하다지만
어린 아이에게 이다지도 잔혹해서는 안된다고 느낀
엄흥도는 단종의 마지막을 지키기로 마음 먹는다.
요즘은 그런 진짜 어른의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잘못을 잘못이라 인정하고
실수를 실수라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어른의 모습...
젊은이들에게 쓴소리로 가르치기 전에,
자신의 모습으로 본보기를 보이는 어른의 모습.
엄흥도에게서 그 그립던 모습의 '어른'을 보았다.
그래서 영화가 내게는 더욱 따뜻했고, 슬펐다.
밥 한술 제대로 뜨지 못하던 단종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게 되었던 것처럼,
엄흥도와 같이 멋있는 어른이
우리 사회의 온기를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얼마 전,
그런 진짜 어른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경험담이 생겼다.
부동산 전세계약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이대가 어린 임대인, 임차인이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만나 계약을 하게 되었는데,
계약서를 쓰고난 다음날
공인중개사에게 일방적으로 문자가 왔다.
원래는 계약서를 쓰는 날 복비를 받으려고 했는데
하루 늦게 연락하게 되었다며,
법정 수수료 최대치에 10% 부가세를 가산한 금액과 함께
계좌번호를 보내면서 전액 선입금을 통보했다.
(현금영수증은 요청시 발급해준다고 한다..)
아직 잔금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황에서
법정 수수료 최대치를 다 선불로 받겠다는
공인중개사에게,
우리는 전체 수수료를 선불로 주는 것은 불가하며,
수수료 협의를 다시 했으면 한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공인중개사는
계약서 날인 이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약이 취소, 해지 되더라도, 잔금을 못받더라도..!)
서비스가 완료된 것이므로 복비를 받는 것과는 상관없으며,
계약이 특이 케이스라 오히려 자신이 수수료를 떼일
위험이 있어서 선불을 받는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잔금 리스크는 우리쪽이 더 컸고,
중개사들에게 문의한 결과 그런 관행은 없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20살은 지긋한 어른이,
책임은 지지 않고, 호의는 100%를 받고 싶다는 모습에
황당함과 더불어 커다란 실망감이 몰려왔다.
결국 계약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이 계약건은 취소되었다.
(이분은 계약 이탈유발자가 확실하다...)
다시한번 다짐하게 된다.
좋은 어른이 되자.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사람을 실망시키는 어른은 되지 말자.
+ 어쩌면 좀 철은 없지만(?) 좋은 어른으로 불리는
장항준 감독의 모습 또한 이 영화의 컨셉과 맞아 떨어져
흥행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천만 관객 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