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걷기
매 년 한 번쯤은 길게 걷는다. 길게 걷는다는 것은 며칠 동안 하루종일 걷는다는 것이다. 혼자 걷기도 하고 여럿이 걷기도 한다. 2019년 여름, 나는 연천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이번 'DMZ생명평화순례'는 임진각에서 출발해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5일 동안 걷는다. 성공회성당 김현호 신부와 오마이컴퍼니 성진경 대표가 추진했다. 인솔자가 나를 내려준 곳은 산골 초입의 마을이었다. 일행 대 여섯이 띄엄띄엄 걷고 있었다. 산의 코앞에서는 그 높이와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름의 한가운데 태양은 따갑게 등을 때렸다.
위로 오를수록 시야는 단조로워진다. 길이야 끊어질 리 만무하겠지. 눈앞에 숲이 펼쳐지더라도 다가가면 넓은 아스팔트는 계속 이어진다. 파란 것은 하늘이고 녹색은 나무와 풀이다. 그리고 회색의 아스팔트. 번갈아 바라보지만 마음은 뻣뻣한 허벅지와 몸을 휘감는 열기와 씨름하고 있다. 평소라면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겠지만 몸에 전해지는 자극이 강렬할수록 생각은 단조로워진다. 의식은 이정표를 만나 자신이 할 일을 찾은 듯 게걸스럽게 문자와 숫자를 핥는다. 도로변의 각종 표지는 무기력해진 의식을 조롱하며 말을 건다. '내가 여기 있는지 누가 알겠어.', '나는 어디에나 있단 말이야.'
여럿이 걷다 둘이 걷다 혼자 걷는다. 누군가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작년에 걸었던 길, 길가에서 발견한 보라색 꽃이 도라지 꽃인지 아닌지, 비가 올지 안 올지, 순례길을 완성할 계획. 하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자연의 소리에 정적을 깨는 말은 '여기서 쉴까요?'
거대한 댐이 산속 깊숙이 숨어있다. 북한이 댐을 폭파해 서울을 물바다로 반들 수 있다고 TV에서 연일 호들갑을 떨었고 학교에서는 성금을 걷었다. 그렇게 여기에 평화의 댐이 들어섰다. 댐 맞은편에는 있어야 할 물이 없다. 아직 북쪽에서 댐을 폭파하거나 물을 쏟아내지 않은 모양이다. 양구의 펀치홀로 불리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뒤쪽은 북한과 맞닿아있다. 둘러싼 산들이 마을을 말아 올려 뒤덮을 것 같다. 이곳은 6.25 때 전투가 치열했던 고지였다. 제주의 성산 일출봉 바닷가에는 작은 시비가 있다. 군경이 해뜰역 마을주민을 줄 세워 학살했던 장소를 추모하는 르 클레지오의 글이 적혀있다. 비극이 없다면 세상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