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짝반짝사진방 Oct 05. 2023

안 물어요. 타세요.

갑작스런 남해기행 #3

  로얄장 여관을 뒤로하고 섬 오른쪽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는 여정이 3일째가 되면 체념의 시간이 온다. 고장 난 자동차의 체념, 더위의 체념, 불편한 어깨의 체념, 왜 걷는가의 질문에 체념하게 된다. 걷는 중 생각에 빠지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대부분의 생각은 멈추면 사라지는 꿈과 같다. 생각은 일어났다가 어느 정도 꼬리를 물다 이내 사라진다. 개 한 마리와 코스모스와 나비와 길과 태양과 바람과 하늘 그리고 바다와 함께 걷는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 이런 고즈넉한 길이 내게 일께 우는 것은 고요함이다. 딛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함을 알려준다. 발걸음 소리는 그저 상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해에 다리가 놓여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됐다. 어머니는 해병대의 상륙정을 타고 육지를 왕래했고 나는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코스모스가 도열한 길 한복판에 벌떡 누워 친구와 담력을 자랑했다. 자전거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고 심부름을 했다. 내게 섬은 넓기만 했다. 섬에서 길을 떠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남해도는 삼천포의 반대쪽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통해 하동으로 넘어갈 수 있어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남해 또한 섬이 아니게 됐다.


   걷는 사람은 멀리 보지 않는다. 멀리 볼 때는 멈췄을 때다. 걸을 때는 길을 본다. 나무와 풀, 꽃을 본다. 집과 사람을 본다. 개와 고양이를 본다. 게울 과 덤불을 본다. 어린아이 손가락만 한 벌레 한 마리가 코스모스 꽃송이로 부지런히 날아다닌다.ㄱ자로 구부러진 주둥이로 꿀을 빨고 있다. 그 옆에서 나비도 분주하다. 저것들이 저렇게 다니는 것과 내가 다니는 것이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산 어귀로 통하는 길 쪽에서 승용차 하나가 다가온다. 

   "어디로 갑니까?"

   "남해로 갑니다."

   "타세요. 바래다 드릴게요."

 뒷좌석에 제법 큰 개 한 마리가 앉아있다. 내가 주춤하자.

   "안 물어요. 괜찮아요."

개에게도 인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얌전해 보였다. 개와 동석하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개의 이름은 '뚜꺼비'다. 뚜꺼비의 주인은 독일마을 아래쪽 물건항에 있는 마리나 리조트에서 '뚜꺼비'라는 감자탕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근처에 빈집을 하나 마련해서 다녀 가는 길이고 수선해서 손님들 숙소로 사용할 것이라 했다.  읍내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데 밥을 사겠다, 어제는 가족 손님이 왔는데 두부를 썰게 했고 그렇게 손님과 터울 없는 사이가 된다, 자신은 남해사람이 아니고 남편을 따라오게 되었고 젊었을 때 카레이서였다고 했다. 친구들과 통화하며 국수 맛집을 알아보고 골목길로 접어들어 차창을 내리더니 몰려있는 사내들에게 행선지를 묻더니 '뚜꺼비식당'에 놀러 오라 말했다. 나는 옆에 있는 뚜꺼비의 이마와 목을 연신 긁어주었다. 


  그들과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꽃농장 운영자, 코스메틱 사장님, 뚜꺼비식당 사장님, 셋은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오랜 친구처럼 거기에 있었다. 정비소에 전화를 했다. 라디에이터를 교체했고 냉각수를 채워야 엔진의 고장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다른 고장이 없기를 바라며 무작정 정비소로 걸음을 떼었다. 정비소는 승용차로 지나왔던 길을 3km 정도 거슬러 가야 한다. 차량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음 일정을 정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을 지나고, 맹렬히 짓어대는 어느 집 울타리 안의 개를 뒤로하며 읍내를 벗어났다. 낮은 언덕 위로 올라서자 저 아래로 정비소가 보였다. 노란색 스타렉스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스타렉스는 아버지의 유품이다. 은퇴 후 어린이집 차량 운전으로 벌이를 하셨다. 하루 두 번 운행하니 여유 시간이 많았고 경기도 양주시의 한적한 도로는 운전에 어려움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차 안에는 색연필, 장난감, 어린이용 우산이 굴러다녔다. 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셨고, 아파트 단지 내에 주차된 노란 스타렉스는 어머니에게 위안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노란 스타렉스로 아들의 귀가를 확인한다. 저기 정비소에 어머니의 노란 스타렉스가 있다.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끝-


작가의 이전글 왜 걷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