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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운다는 것, 내 안에 축적한다는 것

#암기력 #부러움 #메모습관 #맥락적경청 #체화 #되새겨서축척 #확장

by 오렌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공자


나이가 들수록 암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나 역시 문득 떠오른 생각이 금세 흩어져 버리곤 한다. 돌아보면, 예전에도 특별히 암기를 잘하던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간혹 정리를 또박또박 잘해 낸다든지, 수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기억해 내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고 닮고 싶었다.


이런 마음은 특히 그룹 코칭이나 팀 코칭, 워크숍을 진행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현장에서, 어느 정도 흐름대로 흘려보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핵심을 정리해 주고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1:1 코칭 상황에서는 그나마 순간 집중력으로 잘 이어가던 대화가, 여러 사람을 마주하면 한 박자씩 늦게 대응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오랜 경험이 쌓인 전문가들이 토론장과 토의장, 회의를 이끌 때 보여주는 빠른 요약 능력은 언제 봐도 감탄스럽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기록의 기술’이 중요해진다. 나는 메모를 하거나 기록할 때, 마치 지도를 그리듯 머릿속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적어 나간다. 누군가의 깔끔하고 표준화된 방식과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정리해 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만의 노하우가 궁금해진다.


흔히들 ‘메모를 잘하라, 메모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한다. 내게 메모는 단순한 필기를 넘어,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이었다. 들은 내용을 적으면서 확인하고, 거기서 의문이 생기면 다시 듣고 적는다. 그렇다 보니 남들보다 시간이 두세 배씩 걸릴 때도 있었다. 학창 시절 필기를 예술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이 부럽긴 했지만, 반대로 나는 여러 조각으로 나뉜 정보를 큰 그림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해 보는 데에 강점이 있었다. 마치 퍼즐 맞추듯 맥락적으로 하나하나 끼워 맞추고, 위치나 각도를 달리 보면서 전체 그림을 완성해 가는 식이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암기력’이라는 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내용을 넣어 두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적으로 경청하고 정리하는 태도’와 연결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핵심을 골라내고, 그것을 요약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어쩌면 기억력의 문제이기 전에, ‘얼마나 맥락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라는 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면서 ‘그냥 외워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공인 시험을 본다든지, 새로운 정보를 빠른 시간에 숙지해야 하는 일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만의 암기 꿀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보니,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그저 ‘억지로 외우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내 일상에서 경험한 것들을 제대로 축적하고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몸과 마음에 익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수준의 통합적 체화가 궁극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과 이론적인 지식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서, 어느 순간에든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게 만들려면 말이다. 또 내가 눈치채지 못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불안이나 신념들이 학습을 가로막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쌓은 의견이나 판단에 스스로 너무 집착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외운다’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정보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겪어 왔던 일들과 일상에서 얻은 통찰이 지식과 지혜로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엔 “왜 이리 외워지지 않지?” 하고 애달파했는데, 사실 이미 나의 경험과 지식은 퍼즐 조각처럼 조금씩 연결되고 있었던 셈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외운다’는 표현보다는 ‘되새겨서 축적해 간다’는 말이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가령 그 누군가와의 대화, 여러 번 반복해 온 강의, 크고 작은 토론의 장에서 얻은 깨달음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필요할 때 툭 튀어나오는 것이야말로 내가 바라고, 또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진정한 ‘학습’과 ‘숙련’이 아닐까.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배우고 익히며 삶 속에서 재생성하고 확장해 가는 축적의 기쁨.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배움과 경험을 한층 더 깊고 넓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외워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축적된 경험이 언젠가는 꼭 필요한 순간에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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