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생명줄이야

캐나다 학생비자로 미대에서 살아남기 2-1

by 정하서


언제 고향을 떠났다는 걸 느껴요?




나는 캐나다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요.


불합격을 바라고 바랬지만 포트폴리오가 이미 통과된 상태였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눈을 뜬 주말 아침, 2학년으로 승급되었다는 합격 메일이 도착했죠. 분명 깬 것 같은데 거실로 나오지 않는 절 이상하게 생각한 아빠가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어요. 눈치가 어찌나 빠르시던지. 2학년으로 합격했니? 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어요.


좋아하는 아빠의 앞에서 큰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렸어요. 너무 싫었거든요. 이 합격증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토론토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많은 돈을 썼고 시간을 들였고 내 눈앞의 부모님도 나 몰래 보낸 시간 속에서 수없이 고심하셨을 테니까요. 이미 과정은 끝났고 결과는 나왔고 결론이 남은 채였어요. 어쩌면 그때, 돌아가기 싫어요. 라고 말했어야 했어요. 그 모든 이유라는 게, 또 지나가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떠올릴 일 따위가 되지 않았을까,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상상했는지 몰라요.


8월 20일에 비행기를 타고 인천을 떠나 토론토에 도착하는 13시간 즈음 동안 얼마나 울었던지, 승무원 언니가 몇 번이고 괜찮냐 물었던 기억이 나요. 하필 신경 쓰이는 승객을 만나버렸던 그분들께 죄송했고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건네주시는 물컵들 덕분에 조금은 덜 외로웠다고요.


어학연수 기간에 사귀었던 친구 집에서 10일 동안 신세 지며 당장 9월부터 살 곳을 찾아야 했어요. 보증인이 없는 학생비자가 구할 수 있는 집은 딱 두 가지였죠. 1년 계약에 6개월치를 미리 완납해야 하는 1700-1800불의 원룸 혹은 원베드 콘도거나, 지어진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의 원베드거나. 저는 후자를 선택해야만 했어요.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된지 알 수 없는 변기에다, 환풍기가 없는 스토브, 동네의 온 비둘기가 제집처럼 앉아 사는 발코니,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얇은 한 겹 창이 감지덕지로 느껴질 만큼 집 구하기는 쉽지 않았거든요.


1400불. 한 달에 140만원을 들여 들어간 주니어 원베드를 조금이나마 나은 집으로 만들기 위해 첫 14일 동안 매니지먼트 사무실과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입주 후 14일 동안은 고장 났거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었거든요.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더듬거리며 최대한 친절히 요구했어요. 너무 춥다는 제 말에 히터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보러 왔던 덩치 큰 백인 할아버지가 나의 맨발을 보더니 여기는 캐나다야. 네가 어디서 왔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춥다고 컴플레인을 걸 거면 양말은 신고 있었어야지! 라고 겁을 줄 때도 있었죠. 난 너네가 신발을 신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뜻을 은근히 표현하려고 양말을 벗고 있던 건데! 따지고 싶었지만 뭐서워 입도 안 떨어졌고요. 어찌나 서럽던지.


월세 계약을 하려면 은행 계좌 정보를 아파트 사무실에 넘겨줘야 했는데, 그 목적의 서류를 Void Cheque 라고 해요. 사무실 직원은 브라운 계열의 히잡을 쓴 여성분이었는데, 그분의 영어 발음은 제가 어학원에서 공부했던 것과 너무 달랐어요. "보이드 체크" 가 아니라 "보잇 첵" 정도였는데, 보이드 체크도 뭔지 모르는 제가 보잇 첵을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결국 양해를 구하고 직원을 발음을 녹음해 은행에 찾아가 들려줬죠. 그런데 청구 직원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아파트 렌트 하는데 필요한 서류라더라. 그것과 관련된 어떤 서류다. 더듬거리고 온갖 손짓을 해 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죠. 결국 그날 그 서류를 발급하지 못했어요. 다시 찾아간 본 사무실 직원이 한숨 쉬던 게 기억나요. 어찌나 무력하던지.




드디어 학교 수업이 시작됐어요. 영어로 수업을 어떻게 듣지? 이 기본적인 질문이 그제야 내 눈앞에서 빙빙 돌더군요. 입 안이 바짝 마른다는 걸 문장 그대로 느꼈어요. 첫 수업이 뭐였는 줄 아세요? 오전 8시 30분, 미술 역사 수업. 모국어로 들어도 어려운 미술사를 아침 일찍 영어로 듣는다니. 두려움에 큰 강의실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느 곳에 시선이 꽂혔어요. 영어로 대화하며 여유롭게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딱 봐도 한국인 같아 보이는 세 명의 친구들이었죠. 쉬는 시간에 다가가 몇 마디를 나누었어요. 그 친구들은 어릴 때 캐나다에 이민을 왔대요. 그 순간 깨달았죠. 이 영어 세상에 막 떨어진 나는 여유가 없구나.


그다음 수업은 ESL 영어 수업이었어요.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친구들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수업이라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로 채워졌죠. 그중 당연히 한국 국적도 있었고요. 늦깎이 입학생인 나보다 1살 그리고 3살이 어린 두 친구들 중 한 애는 어릴 때 이민을 온 친구라 그냥 원어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어요. 수업 내내 따라가기 바쁜 저와 달리 긴 다리를 흔들거리며 여유롭게 노트북을 두드렸거든요. 그런데 저를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새로운 친구를 더 사귀고 싶었어요! 하면서 여유롭게 연락처를 받아 갔어요. 또 한 번 아주 노골적인 현실이 새겨지는 순간이었어요.


얘, 너는 여유가 없어.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가는 어린 친구들에게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한국인 사귀지 말라고, 한국인이랑 어울리면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은 아니에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혼자 외국인 사이에서 살아남는 편이 한국인에게 도움받아 사는 것보다는 빠르게 현지 적응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요, 그때는 Chat GPT 가 없었어요. 구글 번역기를 뒤따라 파파고가 겨우 나왔을 즘이었는데 문법이나 문맥을 정확히 번역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죠.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디자인 수업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남자 교수님 발음을 못 알아들어 수업 내내 검색창에다 들리는 대로 알파벳을 쳐 가며 단어를 알아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그 끊임없는 타자 소리에 학생들과 교수님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어요.


캐나다로, 토론토로 돌아오기 싫었고 이 학교에 불합격하길 바랐던 건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요. 국제 학생 등록금은 어찌나 비싸고 재료비는 또 왜 이렇게 비싼지. 돈 들어갈 데가 매일 새롭게 생겼어요.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한국에서의 삶과 똑같았어요. 노력하고 노력하기. 발버둥 치기. 바위에 손에 쥔 계란을 쳐 가며 주먹에 상처가 나도 버티기.


그러다가 또 다른 디자인 수업에서 새로운 세 명의 친구들을 만났어요. 한 명은 어릴 때 이민을 온 캐네디언 코리언이고, 한 명은 캐나다에 온 지 3년이 되었고, 나머지 한 명은 캐나다에 온 지 겨우 몇 개월차, 저와 비슷한 상황이더군요. 저를 포함한 4명 모두 그 수업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었지만 빠르게 가까워졌어요. 왜 이 학교에 왔어요? 한국에서는 어디에 살아요? 무슨 학년이에요? 세상에, 3년이 된 그 친구는 저와 같이 올해 입학이고 2학년으로 입학한 것도 같지 뭐예요. 제가 조금만 더 외향적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을 거예요.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약 3개월쯤 지났을 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총 8명이었어요. 맞아요. 위에 나열한 그 8명이었어요. 모두 동양인이고,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할 줄 알고, 한국을 이해하고, 같이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한 사람들. 과제 때문에 밤을 새야 할 때 같이 교수 욕을 하기도 하고, 싸구려 피자박스를 시켜 나눠 먹기도 하고, 게임을 하느라 과제를 포기한다는 친구를 찾아내 다시 책상에 앉혀 버리기도 하고.


살아내려면 필요했어요. 한국어가, 한국 사람이, 한국 친구가 주는 안정과 편안함은 영어 배우려고 외국 나가놓고 왜 한국인 사귀냐! 는 비판을 아주 가뿐히 넘겼어요. 그야말로 생명줄이었죠.


모든 클래스메이트 앞에 서서 막 발표를 마친 내게 "Your work is disgusting." 이라고 내뱉던 교수의 수업조차 버티게 해 주던 소중한 생명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