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 지난주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인데 읽으면서 좋다는 말만 연신 되뇌고 있다. 정말로, 참 좋다.
음.. 무엇이 좋냐고 하면. 아. 잠시만 기다려 달라. 정말 잘 설명하고 싶은데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 우선 첫 번째로는 생각보다 에세이가 깊었다. 나는 그의 에세이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일상의 소소한 소재를 그만의 필력으로 위트 있게 그려낸다는 것이 좋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위트 속에 삶과 문학에 대한 고민이 함께 녹아들어 감동을 주는 면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 그리고 장편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왜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는지까지. 매일을 평균 10km를 달리면서 성장하고 어떻게 작가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조금 알 것 같았다. 때로 어떤 다른 두 사건이 아무런 연결이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수십 년 동안의 한결같은 달리기와 한결같은 글쓰기는 실제로는 다른 사건 같지만 사실상 두 사건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일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작지 않다.
잠시라도 이 감동을 공유하기 위해 그의 책 일부를 여기에 적는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 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아무튼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다음 나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소설이 어떤 것이 될지 기다리는 그것이 낙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끌어안은 한 사람의 작가로서, 모순투성이의 불분명한 인생의 길을 더듬어 가면서 그래도 아직 그러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시 하나의 성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다소 과장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만약 매일 달리는 것이 그 같은 성취를 조금이라도 보조해주었다고 한다면, 나는 달리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여하튼, 중략하고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저번주부터 ‘아, 나도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하루 종일 들었더랬다. 책을 읽다가도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거친 노면을 박차며 탁탁 탁탁 발소리를 내고 뛰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주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러닝을 할 수 없었기에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토요일 아침 7시 밝아지자마자 뛰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창문을 열었다.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오면 못 뛰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나 뛰고 싶었던지 러닝화가 젖을 것을 감안하고 뛰자는 마음이 들었다. 찬 바람을 폐 안 깊숙이 들이키며 스마트워치를 켰다. 그리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운동화는 금세 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이 시리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에 닿는 차가운 물기를 느꼈다. 잠시,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뛰어보기로 했다. 때로는 망설이는 시간에 그냥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법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잘 뛰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 장거리를 뛰는 건 아니지만, 나름 긴 거리를 뛸 때 사고의 패턴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의 패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패턴이 있다. 처음에는 정말 오만가지 잡생각이 올라온다. ‘신발이 젖었네’부터 ‘오늘은 어디까지 뛸까’부터 ‘오늘은 눈이 오다 그치려나’부터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거치고 지나간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아무 의미도 없는 독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던 불필요한 에너지들이 나가고 있다고.
때로 생각이 많을 때 나는 불필요한 열이 나가지 못해 생각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몸을 혹사해 개운하게 움직이는 날에는 생각도 훨씬 가볍고 개운한 것이 설명이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 쌓였던 잉여의 불필요한 열이 생각으로 흘러나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숨이 가빠지면서 잡생각이 흩날릴 때쯤이면 정신이 현재로 돌아온다.
그때부터는 발을 느끼고 공기를 느낀다. 그리고 생각이 사라지고 가지고 있던 몸의 잉여 에너지들이 열과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면 (어디까지나 내 상상 속에서 느끼는 것들이다.) 그때부터는 추위를 잊기 시작한다. 차가웠던 발가락의 감각이 사라지고 따뜻한 열기가 감싸는 것을 느낀다. 몸이 열로 풀리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서서히 상쾌하고 즐겁기 시작한다. 얼굴로 흩날리는 눈발들, 차가운 공기, 전신을 휘감는 열기까지.
나는 운동을 할 때 느끼는 이 열감을 사랑한다. 수영을 하든, 달리기를 하든 어느 시점이 되면 전신에 열감이 도는데 그때가 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라는 인간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이 살아 있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평상시의 열 에너지는 평온하고 익숙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운동을 하며 올라오는 열 에너지가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 자신의 힘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토요일 하루는 6km를 뛰었다. 뛰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했다. 매일을 뛰고 돌아와 자신이 정해 놓은 시간에는 글을 쓰던 그를 생각했다. 그가 첫 작품을 쓰고 담배도 많이 피우고 체력이 말이 아닐 때 자연스럽게 뛰기 시작했다고 했던 그 시절도 생각했다. 그는 매일 같이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나중에는 채식 위주로 식단이 바뀌었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같이 운동한다는 것은 매일 같이 자신의 몸과 대화하는 것 같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중심으로 먹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을 떠올리며 결국에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레이스를 달리는 장거리 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하건 실은 장기 전인 것이다. 잠깐의 결과와 잠깐의 요행, 잠깐의 인기, 잠깐의 창의력, 그 모든 것들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아주 기본이 되는 무엇인가가 요구되는 것 같다. 그것은 일상의 건강함, 루틴이다. 매일 달리고, 달리며 그가 필요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매일의 달리기 속에서 체력을 향상하고, 몸과 대화하고 그 힘으로 글을 쓰고. 실은 이런 일상의 루틴이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가 재능이 있고,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어떤 열정이 흘러나왔다. 나도 그래야겠다. 나의 길을 찾고, 그것을 찾고 나면 건강한 루틴을 만들어야겠다고. 매일같이 달리고, 수영을 하고, 몸이 하는 말을 듣고 다정히 답하며 체력을 기르고 그 에너지로 쓰고, 읽으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드랜턴을 하나 샀다. 이번달 사정이 생겨 매일 하던 새벽 수영을 못하게 되었다. 요가를 다시 시작할까 했지만 저녁에는 시간이 나지 않아 그것도 요원하다. 그래서 나도 하루키처럼 거의 매일을 - 하루 이틀 사정이 생길 것을 감안했다.- 새벽에 달려 보련다. 해가 뜨기 전에도 달려보고 틈틈이 짬이 나는 대로 달려보려고 한다. 달리기를 하며 쌓인 나의 에너지, 힘들이 나의 삶을 튼튼하게 지탱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나는 믿는다. 내 삶을 지탱해 줄 나의 진정한 아군의 8할은 나 자신이다. 내가 오늘 먹는 음식이고, 내가 쌓아가는 나의 체력이고, 숙고하며 사유하는 나의 생각과 삶을 향한 태도다. 남은 2할이 운, 환경, 나의 편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사람들이 채운다. 그러니 8할을 놓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2023년 12월, 나도 하루키처럼 달리기를 꿈꾸며
덧, 돌아와서 마크로 비오틱 식단으로 밥을 해봤다. 자랑삼아 한번. 요사이 마크로 비오틱 요리를 배우고 있다. 자연의 에너지를 가장 높은 형태로 섭취해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자연주의 식단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관련 설명은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하려고 한다. 아무튼 현미밥과 겨울철 뿌리채소로 한 밥을 먹으니 토요일 하루의 시작은 행복했다. (물론, 저녁에 건강한 식단이 익숙지 않았던 친구가 떡볶이를 먹자고 졸라서 먹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점차 이 습관도 자리 잡아갈 거라 희망을 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