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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Dec 15. 2023

서 있던 줄에서 벗어나기

편승하지 않겠다는 선택

가끔 직장동료와 부동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한 때 나는 집을 사고 싶었다. 적절하고 좋은 부동산 투자만이 플러스 인생으로 돌아서는 길이라고 믿었다. 또한 나만의 공간, 안정적인 삶이라는 것은 소유한 집을 통해서만이 올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장 동료와 심심찮게 부동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매물이 좋은 지도 찾아봤고 때로는 임장도 했다. 수립할 수 있는 예산을 세우고 시세를 보고 시장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일 때가 내가 인생의 변곡점에 와 있을 때였다. 삶을 새롭게 정비하던 시점이었다. 집을 보면서도 한편으로 이상한 불편함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삶은 나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내가 원하던 삶과 부합하나? 빌라는 어떤가? 어떤 상상을 해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수 억의 빚을 지고 회사에는 더 종속되는 삶으로 들어가는 이 길에서 진정 원하던 내 삶이 있는지 되묻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망설임 속에 몇 번의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어제도 동료와 오랜만에 부동산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집 값이 떨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에 투자 가치가 있는 적당한 매물 이야기도 나왔다. 그때가 되면 꼭 이번에는 기회를 잡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 호의에서 비롯된 제언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가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언제나 내가 잘 벌고 잘 살기를 바라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내 가슴의 느낌을 살폈다. 때로 진실은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말해주는 법이다.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저는 텃밭이 있는 주택에서 살려고요. 서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삶을 원하는 것 같아요."


"멀 텐데? 출퇴근은?"


"회사를 다니지 않을 것을 꿈꾸고 있어요. 그리고 퇴사를 하고 나면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이 갖겠다고 줄 서 있는 것들에는 편승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해요. 매일같이 어떤 삶을 꿈꾸는지 묻고 그런 삶을 실현하는데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는 웃었다. 아마도 직장인 모두가 그런 꿈을 꾸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에 대한 머쓱함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에서 너는 참 특이해. 세속을 떠나 사는 사람 같기도 하고. 나는 욕심이 많은데 욕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욕심이 많아요. 그냥.. 남들 다 하는 것을 쫓으며 살아왔는데 그게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런 욕심 말고 내가 상상하고 꿈꾸는 삶을 이루는 데에 욕심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인생길에서 저도 경제적 안정을 찾고 싶어요. 그래서 더 많이 상상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겁니다.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요."


그리고 돌아와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편승하지 않겠다.'


이 의도가 썩 마음에 들어서였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길을 따라 떠나는 것은 이제 그만두겠다는 나의 선택에 영혼이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이 선택이 즐겁고 기꺼웠다. 이제부터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창조하는 길이요, 내가 개척하는 길이다. 함께 경쟁하고 있을 때는 마냥 두려웠던 일들이 왜 설레는 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삶을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관찰자에서 창조자로, 읽는 자에서 쓰는 자로 나의 위치는 이렇게 변화되어 간다. 그 사실이 흥미롭고 즐겁다.




길을 잃었을 때 <기다림>은 용기일 수 있다.


최근에 '꽃들에게 희망을(저자: 트리나 포올러스)'이라는 책을 읽었다. 누군가가 목적 없이 위로만 올라가려는 애벌레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게 마음에 남아 검색해서 찾은 책이다. 내가 몰랐을 뿐 유명한 책이었고 동화책이었다.


줄무늬 애벌레는 태어나서 먹고 마시는 것 외에 인생에서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고, 높게 쌓아 올라가는 애벌레 탑을 발견한다. 모두가 그 탑을 향하고 위로 더 높게 올라가려고 애쓴다. 분명 저 꼭대기에는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희망에 애벌레도 탑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노란 애벌레를 만나 눈이 마주친다. 올라가는 동안 애벌레는 힘들었고 그때마다 저 위에는 무엇이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함이 들었다. 어느 때에는 그 불안함을 이겨내려고 '그런 생각할 겨를 없으니 올라가기나 해!' 하며 자신을 향해 소리 내어 외치기도 했다. 그때 그 소리를 들은 노란 애벌레와 눈이 마주치고 그들은 이야기한다. 자신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모두들 아무 의심도 불안도 없이 올라가고 있으니 가보자고.


그들은 중간까지 오르고 다시 밑으로 내려온다. 아무래도 끊임없이 밟고 위로만 올라가는 일에 의미가 없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둘은 내려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다. 함께여서 행복했지만 점점 일상이 무료해질 때쯤 줄무늬 애벌레는 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노란 애벌레는 남고 줄무늬 애벌레는 탑을 향해 떠난다.


노란 애벌레는 방황한다. 그토록 확신에 찬 줄무늬 애벌레를 보면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부끄럽고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어떤 확신도 없이 무조건 행동만 하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매 순간 생각이 변하는 것 같고 확신이 없었다. 그때 나비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번데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그의 이야기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나비는 그녀가 될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애벌레이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 변화에 가깝다. 결코 다시는 애벌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커다란 도약을 하는 것이다.


그 사이 줄무늬 애벌레는 탑을 오른다. 냉정하고 냉철하게 모든 애벌레들을 밟고 끝까지 오른다. 그리고 깨닫는다. 저 꼭대기에는 진짜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더 높은 수많은 애벌레 탑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줄무늬 애벌레는 노란 애벌레를 생각한다.


노란 애벌레의 기다림이 <용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 동화는 너무도 많은 울림을 줬다. 기다림은 용기인 동시에 지혜일지도 모른다. 특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는 그렇다. 노란 애벌레의 안에는 나비가 될 자질을 품고 있었다.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을 때 노란 애벌레는 더 확신하게 된다. 자신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사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불안과 의심 속에서 모두가 가는 길이 옳다고 여겼고 그 꼭대기에 서는 것만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 탓이다. 마지막에 줄무늬 애벌레는 깨닫는다. 꼭대기에 오르려는 본능은 사실은 날고자 하는 본능이었음을. 그 본능을 잘못 해석한 탓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해 왔던 것들을 멈추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그 기다림 끝에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았을 때 모든 창조적 변화는 시작된다. 그때에서야 나비가 될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지리멸렬한 일상의 참된 의미에 대해


최근 나는 다독가가 되었다. 많은 책을 완독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여러 책을 그때그때 읽는다. 주의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 그저 책을 읽는 행위에 꼭 다 읽어야 한다든지 하는 '이래야 한다'는 한계를 두지 않을 뿐이다.


지난 몇 달간 <통증혁명(존 사노 저)>, <소마틱스(토마스 한나)>,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바딤젤란드) 외 여사제 타프티 등 그의 모든 번역책>, <디바인 매트릭스, 느낌이 현실이 된다(그렉 브레이든)> 책을 읽고 있다. 몇 권은 완독 했고 몇 권은 아직도 읽는 책들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있지만 모두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책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인간이란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체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온전하다. 재생과 회복능력을 충분히 갖추었고 신체는 미지의 우주라 할 만큼 신비롭고 똑똑하다. 그리고 그 신체는 정신과 아주 미묘한 수준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생각, 감정은 지속적으로 몸과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미래를 만들어나간다. 지금의 몸과 삶은 과거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 작용, 행위의 결과이며, 현재 하는 나의 생각과 마음은 미래를 창조한다. 우리가 그저 반응하는 생물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임을 많은 책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 진부한 이야기는 진실이다. 너무도 많은 책에서 왜 인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몰랐을 뿐이었다.


그러니 물을 일이다. 어떤 삶을 원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 상상하고 생각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 없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들처럼 주어진 현실에 반응하고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삶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다면 매일같이 연습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상상하고, 그에 맞는 생각을 한다. 매일 반복해 그것이 어색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땐 현실이 된다. 따뜻함을 원한다면 따뜻한 생각과 상상을 반복하고, 다정함을 원한다면 다정한 생각과 상상을 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매일의 상상과 생각은 미래를 결정하고, 그 생각은 타인과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하는 모든 반복은 지리멸렬한 쳇바퀴 도는 인생 그 이상인 것이다.


2023년 12월, 불안한 생각 중이신가요? 그렇다면 불안을 연습하는 거예요.




덧) 누군가 나의 보잘것없는 글에 세 번째 좋아요를 눌러준 덕에 - 고맙습니다! - 다시 읽게 된 글이다. 19년의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정쩡하고 평범하기만 한 내가 꿈을 꿀 수 있는가, 불안하고 길을 잃어 슬픔에 젖어 있었던 그날의 이야기를 참고 삼아 올린다. 그 고민을 시작으로 멈춰 있었지만, 꾸준히 길을 찾았던 스스로를 꼭 안아주며. 모든 것이 삶의 의미가 충만한 길로 이어지기를.


In the Middle:

https://brunch.co.kr/@orangeday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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