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한 문장으로 돌아온다
글이 써지지 않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헤밍웨이는 옥탑방 창가에 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한 문장을 써 봐.”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저
제1장, 문제 도출: 도파민 시대에 무겁고 긴 글을 쓴다는 것
오감을 자극하는 콘텐츠의 시대다. 영상 콘텐츠가 주를 이루고 그 영상마저도 3초 안에 흥미를 끌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나는 글을 쓴다.
때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듯, 때로는 지인들의 진실한 조언들로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1) 글을 쓴들 누가 읽기나 할까?
2) 하물며 이렇게 긴 글을 누가 읽기나 할까?
3) 하물며.. 무겁고 진지한 글을 누가 읽기나 할까?
이런 질문을 받게 되는 이유는 나의 글이 소위 인기가 없어서다. 인기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지 분석하다 보면 위 세 가지 질문으로 압축하게 된다.
그래서 짧게 쓰고, 제목을 고치고, 내용을 좀 더 가볍게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 또한 내 글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잠시 혼란스럽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잘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존재한다. 잠깐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다. 돈 잘 버는 방법, 조회수를 높이는 방법, 인기를 얻는 방법, 애인을 꼬시는 방법, 취업을 잘하는 방법, 자소서를 잘 쓰는 방법,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까지. 하다못해 잘 늙는 방법도 있다. 너무 많다. 그래서 흔하다.
제2장, 문제 진단: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을 싸움으로 치자. 아니 게임으로 쳐보자. 나는 장기도 체스도 할 줄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안다. 왕을 내어주고 이기는 게임은 없다. 아무리 과감한 선택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승부수가 되는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중심(Core)은 무엇인가? 그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의도에는 종류가 있다. 그 사람의 의도는 인생의 복합적인 화학과정에서 버무려지는 화합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깊이와 느낌, 방향이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의도는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해지기도 하고, 어떤 의도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무엇을 만들어야겠다.' 기준이 타인이 되기도 한다. 그 무엇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어떤 의도는 오랜 기간 삶의 풍화과정을 겪으며 살아남은 무엇인가가 의도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살아온 과정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자신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할 때 의미를 느끼는지 숙고하고 숙성해서 나오는 의도가 그런 것이다. 이때의 의도는 그 사람의 개성이자 삶이며, 독창성이다.
만약 후자의 의도가 어떤 일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체스의 '킹'이다. 마지막까지도 내주지 말아야 할 최종 승부수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그것이 승부수가 될 것이다. 중심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게임은 조금 쉬워진다. 내주어야 할 것과 내주지 말아야 할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제3장, 목적과 목표 세우기: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가?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수 없이 던진 질문이다. 아직 나는 진솔한 글쓰기를 이제야 접한 글린이다. 그렇기에 매번 흔들린다. 세상의 수많은 '좋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때마다 삶은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 질문은 나에게 인기를 끌고 잘할 수 있는 방법을,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혼란하고 혼탁한 머릿속에서 네가 중심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또, '중심을 지키는 일과 상황에 맞춘 유연함을 갖출 수 있는지? 타협을 해도 좋을 만한 선은 어디까지인지 지혜를 쌓아라.'라는 요구다.
그리고 나는, 가슴으로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쓴다. 이제까지 '필요한 글', '흥미로운 글'은 많이 써왔다. 직업 탓이 컸다. 적절하고 재미있는 제목을 쓰고 클릭 수를 높이는 데에 똥줄 좀 타본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들은 헤밍웨이가 했다는 말처럼 '진실한 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의 의도는 나와 같은 사람, 때로 방황을 했던 사람, 수많은 감정과 생각에 흔들리는 사람, 그럼에도 삶의 존엄을 찾고 싶은 사람, 삶의 진실이 궁금한 사람, 인생의 이면을 탐구하고 싶은 사람, 가볍게 소비되는 무엇인가가 아닌 변하지 않는 진실을 찾는 사람, 껍데기 같은 대화보다는 진정한 속내를 내보이는 소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휙휙 지나가버리는 화려한 무엇인가 보다 소탈하고 소박하지만 진정한 자신을 찾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도파민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매 순간 흔들리고 방황했던 한 사람으로서 외로웠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방법은 누구나가 조언해 주면서 정작 넘어졌을 때 어떻게 일어나면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좌절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을, 괴로움 속에서 빛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진정한 나라는 것은 무엇인지? 수많은 생각과 감정은 왜 나타나고 사라지는지?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부정어 속에서 나는 어떤 답을 찾아가야 하는지? 나는 왜 이러는지? 삶이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글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글이다. 그래서 내 글은 가슴으로 쓰고 싶은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의 내면은 공공재라 생각하고 있다. 밖으로 내보인다. 외로운 어딘가의 당신을 위해. 그러니 모두가 다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읽은 북저널리즘에 나온 최근 가장 핫하다는 할리우드 독립 영화사 A24 이야기가 있었다. 최근 할리우드의 대부분의 시상식을 휩쓴 영화들을 만든 제작사다. 이 영화사를 만들 당시 창업주는 거대 상업영화들이 실패하지 않는 시리즈의 영화를 만들 때 창작자의 개성을 중시한 독창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에 베팅을 한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류의 영화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아는가? 류시화 작가의 책 제목처럼 말이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은 결국 자기 이해의 과정이다. 자신의 단점은 진정한 단점인가? 그 단점이 개성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이 무엇을 따르려 할 때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어떤 면인가? 수많은 질문 속에 중심(core)을 찾는 것, 그리고 마음 챙김 명상을 하듯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그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우리가 수많은 생각 속에 길을 잃을 때 호흡으로, 현재로 돌아오듯이. 혼란한가? 그렇다면 중심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2024년, 결국은 기본으로, 현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