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다리 수술을 바로 받지 못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3주를 넘게 수술을 기다렸다.
그 시기, 엄마는 섬망 증상이 있었다. 가끔 헛소리를 했고, 여기가 어디인지, 몇 시인지 자주 헷갈려 했다.
가끔은 엄마가 나를 몰래 불렀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이며. 그러면 나도 좀도둑처럼 조용히 다가갔다.
“내가 모아 놓은 돈이 좀 있다. 너 다 줄게. 괜찮아.”
그럴 때면 어이가 없었다.
“...필요 없어. 엄마 써.”
엄마가 어떻게 모았을지 훤히 보였다. 안 먹고, 안 사고, 안 쓰며 아꼈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을 또 아무렇지 않게 내게 주겠단다.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나는 소변통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부모의 삶은 자식의 가슴에 박힌 돌처럼, 까끌거리고 아프다.
엄마와 아빠는 한 번도 풍족한 적이 없었다. 공무원 월급은 뻔했고, 그 속에서 사건사고는 유독 많았다. 그럼에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의 장례식 비용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 돈으로, 우리는 당신의 마지막 길을 치렀다. 오빠와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주고 싶은 마음”은 내게 죄책감이 되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내가 미웠다. 꿈을 쫓겠다고 회사를 나온 것도, 저 좋을 대로만 사는 삶도. 이 지구에서 내가 가장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엄마, 나 지금... 돈이 많이 없어.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꼭 이렇게 답했다.
“네가 무슨 돈이 있냐. 아직 자리도 못 잡았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마흔이 넘어서도 자리를 못 잡으면, 그건 영영 못 잡는 거 아닐까. 엄마의 시간은 우리가 열 살이던 시절에 멈춰 있나 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오빠가 대기업 팀장인 건 알지?”
엄마도 그제야 웃었다. 자식에게 기대어도 될 시기가 왔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홀로 서려 한다.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여전히 자식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식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시절이 왔다. 엄마는 그것이 못내 서러운 것이다. 엄마의 눈에는 흐르지 못한 눈물이 늘 맺혀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참말로, 복 없는 인생이여.”
“엄마가 무슨 복이 없어.”
“아니여. 복이 있으면 이러고 살겠냐.”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런 순간이 되면, 엄마는 딸에게, 나는 엄마에게 서로의 ‘복’이 되어주지 못한 게 아닐까, 두려워진다. 불쑥 엄마의 자랑이 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돈이 많고, 성공해서 1인실 병실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엄마를 병원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보호자 침대에 누워 내 인생을 미워했다. 주머니엔 먼지만 날리고, 이룬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재능도 없이 글을 써 보겠다며 멀쩡한 회사를 그만둔 등신, 천치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오랜 미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히말라야에서 버리고 싶었던 건 엄마가 아니라, ‘기대에 못 미치는 나’에 대한 미움은 아니었을까. 나는 한평생 엄마가 내 인생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고 여겼다.
내 삶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은 없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없애고 싶었던 건 그런 가족이 아니라, 실패한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미움을,
나는 한 번도 끌어안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알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결혼도 못 하고, 서울에 집 한 채 없이,
돈도 없고, 재능도 없는—나를, 줄곧 미워해 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