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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윤 May 14. 2023

멸균 우유의 인생

적절한 혼란 사이의 균형

저번주 후배와 외근을 나가는 길에 차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 이야기나 하면서 낄낄거리던 중 회사 사람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았던 퇴사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친구는 마지막까지도 우리와 특별한 교류를 하지 않고 나갔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사회생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이 피곤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그는 사적으로는 여러 사람과 친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나도 일면 그런 부분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지금처럼 친한 사람들을 만들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어울리는 사람들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한편, 그런 이야기도 했다. 예전에 나의 삶은 참 정돈되고 깔끔했노라고. 친구에 대한 개념이 명확했고, 선이 분명했던 시절에는 오히려 인간관계가 피곤했다. 내가 원하는 유형에 딱 맞고 선 안에 드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분명하게 경계선을 지켰고, 그에 따른 결과로 일상이 참 깔끔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공허함이 있었다.


경계선이 강할수록 그 선은 내가 그은 것 같지만, 상대편도 알게 되어 있다. 더 강하게 선을 지키라고 요구할수록 상대편도 그 선을 지켜주게 되어 있다. 퇴사한 친구가 우리와 교류를 싫어할 거라 여겨 점점 더 같이 밥 먹자는 이야기도 잘 못했던 것처럼. 나를 보호하려던 선은 어느 순간 장벽이 되고 아무도 오지 않게 될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지키는 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때로 인생에는 여러 가지가 뒤엉킨 혼란과 혼돈이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건강한 삶을 만들지도 모른다. 모든 것들이 나의 깔끔한 통제 안에서 제 자리에 놓이고, 제 때 움직여 주는 것이 인생이 안정감 있고 편안한 것 같지만 실상은 자꾸 끼어드는 불편한 우연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후배가 말했다.


”이건 마치 멸균 우유 같은 거예요. “

“멸균 우유?”

“네, 제 친구 중 하나가 멸균 우유를 좋아하는데, 그 친구한테 이야기했죠. 멸균 우유는 우유 같지만 우유가 아니라고. 나쁜 균도 없앴지만 좋은 균도 없는 상태라고. 마치 우유의 외양은 유지하지만 안에는 영양분도 없는 거죠.”


어랏.. 이 친구.. 천잰데? 아주 비유 적절한 말을 들으며 무릎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예전에 <진실이 치유한다 (데보라 킹 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아직 완독을 하지 못한 책인데 딱 그 에피소드만 생각이 난다. 기억을 더듬어 그 에피소드를 말해보자면 이렇다.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ㄷㄷ 이해해 주시길)


이 책에는 남편이 외도를 해서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 이후 배신감이 깊어지고 모든 관계에 대한 신뢰가 깨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가슴에 어떤 사랑도 들이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졌고 전남편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잠식한 상태다. 치유사인 데보라는 그녀에게 전남편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래야 당신이 가진 심장병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그녀는 화를 낸다. 잘못한 것은 그인데, 내가 왜 용서를 해야 하냐고 울분을 토해낸다. 그리고 데보라는 용서는 남편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 다시 관계를 이어가라는 것도 아니라고 설득한다. 당신 가슴 안에 있는 그 응어리를 내보내고 다시 세상과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세상과 타인을 향해 가슴을 닫아버리면 상처도 없겠지만 동시에 좋은 것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때로 우리는 두려움에 마음을 닫아버릴 때가 있다. 상처받지 않을 곳에 안전가옥을 짓고 그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그 안전가옥을 침입할까 두렵고, 사람들이 찾아와 휘둘릴까 두렵다. 문제는 낯선 이방인도 내치지만 서로를 알아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실한 친구도 내친다는 것이다. 나쁜 것도 들어오지 못하지만 다시 있을 좋은 사랑도 가슴에 들이지 못한다.


이것과 멸균 우유의 삶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삶에 있는 고통, 고난, 혼돈, 피곤함을 제거해야 할 나쁜 균처럼 여기면, 삶이 더 건강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인생인 것 같다.


마치 내가 인간관계에 선을 딱 긋고 깔끔한 일상을 살았지만 그 안에서 공허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나는 내가 마음을 열지 않아서 공허한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 뒤로 어떤 관계든 뒤엉켜 살아가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보면 참 지질하다 싶은 에피소드들이 많이 생겼다.


가장 친했던 사람과 싸워서 아파하기도 했었고, 내가 하는 실수에 이불킥을 하기도 했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내 가장 깊은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고. 그런 사적인 아픔을 이야기하며 같이 울고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장 나약했던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정말 친해질 거라 여기지 못했던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나 또한 내 나이 마흔에 심지어 사회생활에서 미운 정, 고운 정을 뛰어넘는 ‘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좋아지고 정이 드는 경험도 했다.


나는 지금 동료들과 사적으로 만나 같이 스키장도 가고, 언제 어디에서나 같이 술을 먹어도 부담이 없다. 직장에서 만났다는 명함 하나 떼버리면 정말 좋은 선배, 오빠, 언니, 동생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의 관계는 멸균 우유처럼 깔끔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행복을 위한 비밀 한 스푼은 이 깔끔하지 않은 어떤 것에 깃들어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마치 멸균 우유처럼 불편하고 싫은 것은 모두 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 함께 뒹굴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열쇠인지도 모른다. 뒤엉켜 살아가며 인생이 최악으로 피곤해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하지만 이 모든 피곤한 우연과 에피소드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기도 한다. 모든 고통을 거세당한 삶에는 어쩌면 사랑도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행복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함께 지탱해 주는 것이며 우리 삶의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 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고통을 통해 힘이 솟구치며 고통이 있어야 건강도 있다. 가벼운 감기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지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기만’ 한 사람들이며 고통받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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