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빙빙빙 맴도는 영화 대사 04 | 영화 페인&글로리
사랑은 마치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땅한 상대가 있어야지만 나의 사랑은 일어난다고 말이다. 내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지에 대해 상대에게 요구하듯이.
혼자 상상컨대 사랑받을 자격을 마음속에 두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진화하면서 갖춘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번식과 생존에 가장 유리하고 안전한 배우자를 찾는 것은 우리가 가진, 사랑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벗어버리면 드러나는 욕망이다. 하지만 너저분한 진실은 아니다. 그저 그런 사실일 뿐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 가는 중요하다. 누구나 아무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당신의 이러저러한 면이 좋았어요. 당신의 이런 면들 때문에 나는 사랑에 빠졌고, 당신의 어떤 모습 때문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런 류의 독백은 흔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잘 해체해 보면 사랑의 주체는 상대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신이었다고 말한다.
영화 <페인&글로리>에서의 한 장면은 사랑의 주체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없이 나의 인생에 충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사랑의 평가 기준이 상대에게 향해있던 나에게, 내가 하는 사랑의 질적 평가는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대사였다. 상대의 잘잘못 대신, 당신에게 당신의 사랑은 무엇을 남겼는지? 당신은 그 사랑이 어떤 조건에도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는지 살바도르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요. ^^>
페데리코: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네. 당신 기분.. 당신이 고통받은 것 전혀 몰랐어.
살바도르: 인생 수업이었지.
페데리코: 뭐라고?
살바도르: 사과할 것 없어. 내가 하고 싶지 않았던 걸 한 적은 없으니까. 해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주고 싶었지.
스페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살바도르는 자신의 출세작이 개봉한 지 32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배우 알베르토를 찾아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32년의 세월 동안 몸도 마음도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살바도르는 알 수 없는 신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가 사실 알베르토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헤로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해진 그는 고통이 제어가 안 되는 날에는 헤로인을 하게 되고 어느덧 중독된다.
알베르토와 함께 헤로인을 하던 어느 날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쓴 ‘중독’이라는 작품을 우연히 읽게 된다. 그의 연인이었던 페데리코와의 사랑 이야기였던 작품을 읽고 알베르토는 이 작품을 극으로 올릴 것을 설득한다. 어렵게 허락을 구한 알베르토는 중독을 독백극으로 연극을 올리고 살바도르를 연기한다.
이 작품을 우연하게 본 페데리코는 그날 밤에 살바도르를 찾아간다. 살바도르의 연인이었던 페데리코는 당시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었다. 살바도르는 그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결국 치유되지 못했고 사랑은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겪은 고통을 페데리코는 알지 못했다. 그의 극을 보고서야 이런 진실을 알게 된 페데리코는 공연을 본 날 살바도르를 찾지만 초인종도 누르지 못한 채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말한다. 사과하고 싶다고.
살바도르는 그의 전화를 받고 방안을 서성이던 중에 그가 아닌 척하고 있지만 집 앞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창가에서 페데리코를 내려다보며 이 대사를 읊는다.
사과할 필요가 없어라고. 모든 것은 인생 수업이었고, 당신에게 해준 어떤 노력도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한 것이 없었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잠이 다 깨어버렸으니 집으로 오지 않겠냐고 페데리코에게 제안한다. 잠시 시간을 번 20분간 살바도르는 다시 사랑에 빠진 듯이 허둥지둥하며 이 옷 저 옷을 고르고 준비를 한다.
다시 재회한 그 둘은 함께 마주하며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눈다.
페데리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에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살바도르: 그 얘긴 하지 말자. 굉장히 슬픈 글이잖아.
페데리코: 나를 돌봐주면서 작가와 감독으로서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가벼워졌어. 정말 그렇게 느꼈었어?
살바도르: 네가 방해한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여태까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채우지 못했던 내 삶을 채워주었어.
페데리코는 살바도르와의 사랑이 끝난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한다. 그가 살아온 과정을 듣고 그가 꾸린 가정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또 그의 아들의 사진을 보며 페데리코를 닮았다고 이야기하며 함께 웃는다.
그와의 옛이야기를 하다 헤로인에 중독된 그를 보내 줘야만 했다고 말하는 살바도르에게 페데리코는 살바도르가 중독이라는 작품에 썼던 대사를 읊는다.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에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살바도르는 말한다. 네가 중독으로 아팠고 너를 치유하기 위해 나는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넌 헤로인을 이기지 못했고 나는 아프게 이 사랑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너는 내 인생을 채워줬고 네가 내 인생을 방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이다.
내가 이 대사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넣어둔 이유가 사랑이 삶의 과정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글쎄,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약 나에게 첫사랑이 있고 나는 그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가 약물 중독에 걸려 나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나는 그를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언제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그런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면, 훗날 나는 그 사랑은 내 인생의 시궁창 같은 경험이었다고 하지 않았을까.
원망도 없이, 질책도 없이 이렇게 마주 앉아 추억을 곱씹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힐 수 있었을까. 여전히 그리워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사과를 할 필요도 없고, 너는 내 삶을 충분히 채워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살바도르의 담담한 대사가 마음을 울렸다. 사랑도 삶의 일부라면 아픈 사랑의 경험, 내가 그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해봤고 좌절했던 경험, 나의 사랑이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했던 아픔이 지나와 보니 나의 삶에 영광을 줬다는 깊은 성찰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실이며,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며, 사랑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사랑을 고르는 것보다도 내가 어떤 사랑을 주었고, 어떤 사랑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했던 사랑이 비록 상대를 구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했을지라도, 너와 함께했던 시간이 살을 에는 아픔을 주었을지라도 동시에 영광스러운 나날이었노라고, 그렇기에 나의 삶은 충분했고 풍요로웠다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삶과 사랑이 준 아픔으로 더 성숙해진다. 자고 가기를 원하냐는 페데리코의 말에 살바도르는 말한다.
“신이 정해준 대로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