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온전함
방해받는 순간도 배울 수 있는 순간이다.
작년 겨울에 새벽 아쉬탕가 요가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자이요가명상에서 예마 선생님의 수업이 새벽 6시에 있었다. 선생님은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수업은 새벽에 줌(Zoom)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말씀하셨다.
“아이를 키우면서 수련하기 힘드시죠? 중간에 아이가 깨도 괜찮아요. 아이가 방해하는 것까지 수련으로 포함시켜 보세요.”
아마도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좀 있었나 보다. 나는 내 수련에만 열중하느라 몰랐지만 아이가 깨서 잠시 수업을 중단하거나 화면에서 사라지는 분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친절하게 그런 분들에게 아이가 깨서 수련을 이어가지 못할 것 같으면 잠시 나갔다 와도 괜찮고 수련이 중단되어도 괜찮다고 했다. 다만 수업을 나가지는 말고 방해받는 순간까지 포함해 수련을 이어가 보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참 그 말이 너무도 신선했다. 안 되는 것까지 포함해 수련한다라니. 온전한 1시간 10분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 좋았다. 그리고 방해하는 순간을 포함해 자신을 살피면 그것도 수련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련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날은 기적같이 1시간 10분을 온전히 쓰는 날도 있을 것이라고, 그런 날은 그런 날 대로 감사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가 방해하면 함께 할 수 있는 수련의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 또는 온전한 집중이 깨졌을 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관찰해 보는 것 그것도 수련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살아왔던 방식이 깨지면
우리는 자신을 잃는 것만 같다.
하지만 진정 그러한가?
그 뒤 나는 그 말을 내 영혼 속에 넣었다. 마치 모든 것에서 나는 배울 수 있고 언제나 수련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가와 명상을 시작하면서 생긴 나만의 루틴은 삶을 참으로 안정적으로 만들어 줬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루틴이 깨지면 불안이 왔다. 다시 또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과 나를 잃어버리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까지 들었고, 어느 날 루틴이 완전히 깨지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다.
성실함이 주는 부작용은 아마도 ‘강박’ 일 것이다. 만약 방해받는 순간을 포함해 수련할 수 있다면 요가가 잘 안 되는 날, 명상이 잘 안 되는 날도 충분히 수련하고 배울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다. 한 시간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도 좋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살펴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이 수련인 것만 같았다. 하루에 4시간씩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무엇인가는 해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루틴이 깨져서 자신을 잃어간다는 불안함 없이 삶을 안정 궤도에 올릴 수 있을까? 실험해 보기로 했다.
올해는 나에게는 ‘변수’의 해이다. 한 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계획했던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은 항상 생기고 올해 나는 루틴이 깨졌다. 하지만 예전처럼 내가 싫고 밉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실험은 성공했기 때문이다. 루틴은 루틴일 뿐이며, 내가 살아온 방식은 방식일 뿐이다. 루틴은 내가 아니고 살아온 방식도 내가 아니다. 매번 무엇인가 방해를 받을 때 내가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불안감을 만들었다. 그래서 살아온 방식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변수에 화가 났다. 그게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과 루틴이 깨지면 나의 삶은 망가지는가?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을 못하면 나는 없어지는가? 다 망쳐버린 건가? 내가 잘못되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그때 나는 나를 잃는가? 실제 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가? 이 변수를 그대로 포함해 삶을 변화시킬 대안은 아무것도 없는가?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였다. 그것은 느낌일 뿐이며, 불안감일 뿐이었다. 항상 하던 일에서 궤도가 이탈될 때 느끼는 불안감이 생각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나는 올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또, 요가와 명상을 하며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예전 루틴대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수 또한 나의 삶이다. 꾸준함을 이어가면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삶의 변수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모든 것은 내 욕심대로 되지 않지만 그대로 충분했다. 불완전함 그대로 온전함을 배운다.
나는 올해 책을 읽고 사유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많은 시간이 나지 않기에 짬이 나는 대로 독서를 한다. 점심을 직원들과 같이 먹는 대신 샐러드를 싸와서 먹으며 남은 시간 책을 읽는다. 글을 꾸준히 써보고 싶기에 요가를 1시간 줄이고 그 시간에 글을 쓴다. 때로 글을 쓴다는 것은 3시간도 쓰고, 4시간도 쓰기에 그런 날은 요가를 포기한다. 그때에는 혼자서라도 요가를 하거나 러닝을 하고, 운동하는 순간에는 오롯이 몸과 감각에만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루틴이 깨졌다고 해서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루틴이란 것, 더 나아가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란 것은 잘 쓰면 좋은 도구일 뿐 나 자신은 아니다. 조금 궤도에 벗어났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또 그 궤도에서 멀어진 내가 나빠지거나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며 어떤 변화에도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도 있다. 그 변화마저도 사랑할 수도 있다.
내가 살아왔던 방식과 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가진 가능성을 좁히는 것일 뿐이다.
삶의 모든 변수에도 여전히 생명력 넘치는 ‘나’를 발견하는 것.
언제나 깨어있기 위해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올해의 수련이다.
나는 변수의 한 해를 살며 수련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매일을 요가 하고 명상을 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런 날이 왔음에, 그런 조건이 주어졌음에 감사할 것이다. 지금은 변수로 인해 깨어지는 나의 집착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관찰하며 수련할 차례다.
2023년, 오늘도 수련을 이어가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