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레비나스

아듀 adieu 혹은 신에게로 à Dieu

by 오렌지필름


올해 초까지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애도하는 일이 이어졌다.

죽음이 더 이상 먼 것이 아니라는 한 줄의 문장이 나의 현실을 엄청난 무게감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현실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잃어버렸는데, 아닌 척 살아가다가 넘어지면서 처참한 나날들을 살아내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런 일쯤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소중한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 그래서 나도 유난 떨지 말고 잘 살아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애도에 성공하자마자 계속해서 실패하는 기분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지구를 떠난 사람들이 자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자마자 자꾸 그 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마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난 영원히 실패할 것 같다. 사랑도 그렇지만 대부분 실패한 사람들이 그에 대해 더 많은 사유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자크 데리다의 애도를 만났고, 프로이트 식의 방법론적인 애도가 아니라 죽음, 애도에 대한 사유를 담은 태도가 좋아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애도에 실패한 사람이 그러나 겨우 이제서 조금 죽음에 대해 바라보게 된 사람이 써 내려가는 작은 사투의 글로 보아도 무방함을 밝힌다.



1

<아듀>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한 조사(弔詞)로, 1995년 12월 27일에 팡탱 묘지에서 자크 데리다가 낭독한 글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로부터 1년 뒤에 "에마뉘엘 레비나스 헌정 학회"의 개막 강연인 <맞아들임의 말>이라는 글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비통함에 젖어 급히 쓴 조서와 함께, 1년 뒤에 존경하는 친구이자 학자인 레비나스의 연구를 짚어보는 글. 그리고 이 책은 <아듀>부터 시작한다.




2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두려웠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아듀'라고 말해야 할 날이 말입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큰 목소리로, 이 자리에서, 그의 앞에서,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아듀라는 이 말을 발음하는 순간, 제 목소리가 떨리리라는 것을." (11)


<아듀>의 첫 문장이다. 데리다는 이 글을 통해 레비나스가 자주 언급했던 아듀를 가져와 데리다 식으로 다시 쓴다. "아듀 adieu 혹은 신에게로 à-Dieu"(11) 그리고 이 표현은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사랑과 존경을 담아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를 경유하기 시작한다.


"순진함 없는 순수함, 어리석음 없는 올곧음, 자기에 대한 절대적 비판이기도 한 절대적 올곧음, 이 올곧음의 끝인 자의, 그 시선으로 나를 문제 삼는 자의 눈 속에서 읽힌 절대적 올곧음, 타자를 향한 운동, 초월을 감당할 수 없는 유희가 그렇게 돌아오듯, 자신의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운동, 염려 너머의, 그리고 죽음보다 더 강한 운동. 야곱의 본질인, 테미 무스 Temmimouth라고 불리는 올곧음. 이 성찰에는 우리를 일깨우는 레비나스 사유의 모든 위대한 주제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매번 독특한 방식으로요." (14)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가 정답인 듯 보이지만 사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길 요구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이면과 다른 이면, 그리고 또 다른 이면 그 사이의 긴장.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어떤 무언가. 레비나스는 정의한 죽음은 다음과 같다.


"타인의 얼굴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죽음, 무-응답으로서의 죽음, 죽음은 응답-없음"(20).


"타인의 죽음과 맺는 관계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앎이 아니다. 또(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듯이, 타인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타인의 무화로 귀착하는 것이라 해도) 존재를 무화하는 그 방식 자체 속에서 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예-외적 관계에 대한 앎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의 죽음에 대해 내가 지는 책임은 타자의 죽음에 나를 끌어넣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매우 수긍할만한 명제 속에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나는 타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 책임이 있다.' 타자의 죽음, 그것이 여기서는 첫째가는 죽음이다."(23)


"죽음의 예-외 속에서 죽음과 맺는 관계는 미지의 것 속에서의 감정이고, 운동이고, 불안정이다." (25)




3

데리다는 이에 첨언하며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그래서 오늘 나는, 우리의 한없는 슬픔이 애도 속에서 무로 향하지 않도록, 다시 말해 잠재적일지라도 또다시 살해의 죄의식 속에 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대해 말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 없고 빚이 없는 죄의식입니다. 그것은 사실, 맡겨진 책임이지요. 죽음이 절대적 예외로 남아 있는 순간, 견줄 바 없는 감정의 순간 속에서 맡겨진 책임입니다. "(23)


"레비나스를 읽고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감사와 감탄으로 눈이 부십니다. 경탄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강제 때문이 아니라, 의무를 지우는 너무나 온화한 힘 때문입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 속에서 사유의 공간을 달리 구부러지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전적인 타자와 관계하게 하는 이 이질적인 다른 구부러짐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 타자에 대한 관계, 이것은 법에 의해, 그러니까 전적인 타자의 무한한 다른 우선권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 (30)


마지막 문단은 첫 문장이 그랬던 것처럼 문학적으로 아름다워 길지만 최대한 많이 옮겨본다.


"이 질문-기도가 나를 레비나스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처음에 말했던 이 아-듀의 경험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듀는 목적성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하지요. 궁극적인 것이 아닌 이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요. 아-듀는 존재 너머의 타자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존재 너머에서 영광의 말이 의미하는 것 속에서요. '아-듀는 존재의 과정이 아니다. 그 부름 속에서 나는 이 부름에 의미를 주는 다른 인간에게로, 내가 그를 위해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이웃에게로 돌려보내 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는 레비나스가 아-듀에 대해 우리에게 털어놓은 것을 상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그에게 '아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듯 그를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의 성 아닌 이름을 부르면서 말입니다. 이 순간, 그가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그가 우리에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러나 우리에 앞선 우리에게, 우리 앞에서 응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면서, 우리에게 '아-듀'를 일깨우면서.


아듀, 에마뉘엘." (37)




4

<맞아들임의 말>은 앞서 밝혔듯 레비나스의 사유의 흔적을 따라가는 데리다의 강연의 글이다.


레비나스는 타인, 얼굴, 환대, 언어, 사랑, 제삼자에 대해 사유했고 그 과정에서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온다. 이 글에서는 레비나스가 정의한 몇 개의 단어들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 맞아들임

"대화 속에서 타인에게 접근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의 표현을 기꺼이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타인은 사유가 그 표현에서 간취하는 관념을 매 순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아의 능력을 넘어서서 타인으로부터 받아들인 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말해 무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 즉 대화는 비-알레르기적 관계며, 윤리적 관계다. 그러나 이렇게 맞아들인 대화는 가르침이다."(46)


- 사랑

"초월의 형이상학적 사건은, 즉 타인의 맞아들임, 환대, 또 욕망과 언어는 사랑으로서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화의 초월은 사랑과 엮여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사랑에 의해 초월이, 언어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동시에 덜 멀리 나아가게 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85)


- 언어

"언어의 본질은 선함이다. 또한 언어의 본질은 우정이고 환대다." (102)


- 아듀

"나는 우리가 언제나 이 세계에 실제로 있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달라지고 있는 세계다. 상처 입기 쉬움, 그것은 이 세계에 아듀라고 말하는 능력이다. 사람들은 늙어가면서 이 세계에 아듀라고 말한다. 시간은 이 아듀로서 또 아-듀로서 지속된다." (225)



5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 환대

"레비나스가 지향적 주관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규정할 때 주관화를 유한 안에서의 무한의 이념에 종속시킬 때, 그는 한 명사에 의해 다른 명사가 규정되는 명제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증폭시키지요. 그때 실체적 주어와 실체적 술어는 그 명제 속에서 자리를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문법과 전통적인 글쓰기 논리를 그 변증법적 파생물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뒤흔들어 버립니다. " (52)


"환대라는 말은 그 앞에 오는 두 단어, 즉 '주의'와 '맞아들임'을 번역하며, 진전시키고, 재-생산합니다. [....] 다른 것, 타자를 향한 긴장이, 주의를 쏟는 의도가, 지향적 주의가 나타납니다. 예, 타자를 향해서요. 지향성, 말에 대한 주의, 얼굴을 맞아들임, 환대, 이것들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자를 맞아들임으로써 같은 것이죠. 여기서 같은 것은 주제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운동 없는 이 운동은 타자의 맞아들임 속에서 지워지고, 또 타자의 무한에 대해 열립니다. 그렇기에 타자의 맞아들임은 이미 응답일 것입니다. 이 응답은 무한이 맞아들여지자마자 요청되지요. 그러나 이 순간인 아르케의 순간이나 문턱을 가리키지는 않아요. " (54)


"주제적이기보다는 작용적이라 할 이 개념은 다름 아닌, 타인을 향한 최초의 모든 몸짓을 말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57)


- 제삼자, 삼자성

"문제의 탄생, 그것이 제삼자예요. 그래요, 탄생이지요, 제삼자는 기다리지 않으니까요. 제삼자는 얼굴과 대면의 시초로 옵니다. 그래요, 문제로서의 문제의 탄생이지요. 대면은 즉시 중지되니까요. 대면은 중단됨 없이 중단됩니다. 대면으로서, 두 독특성의 쌍으로서 말이죠. 제삼자의 불가피함은 문제의 법입니다. 한 문제의 문제, 타자에게 그리고 타자로부터 건네진 것으로서의 문제, 타자의 타자, 확실히 최초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것도 선행하지 않는 문제의 문제, 아무것도 특히 누구도 선행하지 않는 문제의 문제." (67)


"타인을 맞아들이는 가운데 지고함을 맞아들인다는 것, 이것이 주체화 자체예요. 우리가 독해를 시작했던 그 문장("그것은 말에 대한 주의 또는 얼굴을 맞아들임, 환대이지 주제화가 아니다")은 일종의 정리 또는 결론입니다. 그것은 주체성을 환대로서, 부정이 없는, 따라서 배제가 없는 분리로서 재정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요. 윤리적 긍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탈연관에 대한 아포리즘적 에너지로서 말이죠." (109)


- 아듀

"아-듀라는 말도 동일한 조화에 속합니다. 명사 이전에, 동사 이전에, 부름의 깊은 곳으로부터 또는 침묵의 인사로부터, 그 말은 이름으로 이름을 부르기 위해 명명되었어요. 명사 없이, 동사 없이, 거의 침묵으로부터, 아-듀는 얼굴과 합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에서 죽음을 만난다." (222)


"아-듀를 관념으로 환원해버리면 우리는 그 표현을 중립화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죽음을 망각하기 위한 구실을 취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레비나스 사유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한 성찰이었어요. 죽음에 대한 관심이나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을 지금까지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방향을 돌려 자기밖에 놓게 한 성찰이었지요. [....] 더 이상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로 접근할 필요가 없는 죽음의 시간을요. 그러니까, 이 죽음의 시간에 대한 인사 또는 부름이 아-듀라는 말인 것이죠. 레비나스는 얼굴의 극단적 올곧음을 환기했지만, 요구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 (224)



6

강연에서 레비나스가 주요하게 다뤘던 '얼굴과 시나이'는 성서를 향한 질문을 통한 여러 개의 주석으로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성찰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성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관계로 글로 옮기질 못했다. 소화를 못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남은 과제로.... 그리고 데리다가 아듀를 재 정의한 부분도 함께 첨언하며 이 글을 마친다! 어려워!



-시나이 이전의 토라의 인식?

형제애 / 인류애 / 환대

; 이를 통한 레비나스의 성찰은 평화로 향하고 있다.

전쟁이 평화를 여전히 증언한다, 전쟁이 평화의 현상이 된다는 것.



"아-듀라고 말함은 인사와 약속을, 환영과 이별을 한 단어에서, 그러나 무한하게 교차시킵니다. 이별의 한가운데서의 환영을, 성스러운 이별을 교차시킵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러나 또한 바로 그 순간에 타자와 맞닥뜨리면서, 맞아들임의 몸짓 속에서, 그리고 언제나 무한하게 말이지요. 아듀. 의심할 바 없이 무한하게, 왜냐하면 아-듀는 무엇보다 무한의 관념을 말하니까요. "(191)


"여기서 à(에게)-Dieu(신)이라는 뜻으로 그것은 자신의 '에게'를 무한에게, 이 '에게'를 부르고 자신을 그것에게 보내는 무한에게 보냅니다. [...] 아-듀라는 , 신에게라는 욕망 말이지요. 신에게 말함으로 달려있다." (192)




아듀 레비나스

저자 : 자크 데리다

책 소개 : 『아듀 레비나스』에는 두 편의 글, 1995년 12월 25일 89세로 세상을 떠난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이 실려 있다. 이 글들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앞으로의 논의에 열려 있는 가능성까지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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