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시론

들뢰즈에 앞서서 그러나 넘어서서

by 오렌지필름

<물질과 기억: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시론 Matiere et memoire> /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들뢰즈의 시네마를 여러 번 읽기를 시도하다가 덮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차근히 접근해 보고 싶었고, 시네마를 읽기 위한 길목에서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추천받았다. 그리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지적인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들뢰즈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인 걸까? 이와 같은 생각은 차치하고서라도, 여러 가지로 분산되어 있었던 근래의 흥미도 하나로 이어졌다.


과학, 시간, 기억에 대한 다른 차원의 접근


나는 학교에서 옮긴이가 김재희로 되어 있는 책을 빌렸고, 이 책의 구성은 베르그송을 이해하는 입문 서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송의 배경과 당시 철학적 상황, 주요 개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문을 읽는 타이밍에 꽤 적확하게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책의 서문에는 베르그송을 하나의 고전으로 왜 읽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도 동의하기 때문에 아래 문장을 옮기기로 한다.


“<물질과 기억>이 오늘날 꼭 읽어볼 만한 고전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학적 사유의 전통적인 주제로서 누구나 한 번쯤 던져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실재와 인식 사이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물질과 정신, 또는 신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적 삶이 지니는 다층적 구조와 하나이면서 여럿일 수 있는 다양체로서의 자아 개념, 실재와 접촉하며 인식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인간적 경험의 의미, 가시적인 물질적 세계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비가시적인 정신적 삶의 창조적 역량에 관한 긍정 등 <물질과 기억>의 궁극적인 해답들은 뒤엉킨 실타래와 같은 물음들을 정리해주며 답답한 가슴을 환하게 뚫어주는 깊은 통찰과 감동을 지닌다.


또 다른 하나는, 탈근대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사회, 문화를 이해하고 사유하는데 필수적인 철학적 개념들의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질과 기억>에는 시간, 기억, 이미지, 차이, 반복, 다양성, 잠재성, 무의식 등 현대 문화의 핵심 키워드가 다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속도와 리듬의 차이에서 해명되는 시간의 복수성, 다양성과 차이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의 역량, 가상현실의 존재론적 의미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에 대한 발견, 정신분석학과 대결할 수 있는 무의식과 기억의 새로운 의미, 시뮬라르크적 가상의 열등한 위상으로부터 현대적 역할에 걸맞게 실재성의 함량을 회복한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 등 현대 철학에서 사유되고 있는 다양한 개념의 뿌리들이 바로 <물질과 기억>에 닿아있다. (9)”


<물질은 단지 반복할 뿐이지만 정신은 반복하면서 차이를 산출한다>는 물질과 정신에 관한 새로운 개념화. <과거와 현재는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시간은 끊임없이 분열한다>는 비 연대기적인 새로운 시간 이해, 그리고 <움직이는 이미지들이야말로 부동화된 표상 체계를 넘어서 실재의 잔상을 표현한다>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 (22)


“나의 모든 생각들을 뒤집어 놓았던 것은 바로 역학이나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었습니다. 너무도 놀랍게도, 나는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전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실재하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한꺼번에 다 펼쳐 놓는다 해도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인식에는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실증 과학이란 본질적으로 이렇게 지속을 제거하는데서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 (28)


기억은 쪼개고 쪼개진다. 그 안에서 물리적으로 보냈던 시간은 매번 다른 텍스트로 우리에게 해석되길 요구하지 않는가? 실제적으로 펼쳐진 시간은 중지한 그 순간일 뿐이라니. 그 유명한 제논의 역설“날아가는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도 함께 나온다.


실재는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 속에 있으며, 실재의 운동성은 질적인 변화의 연속이라서 이전 것으로부터 이후 것이 결정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운동은 항상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 예측 불가능한 과정 그 자체로 불가분 한 전체이며, 이를 부분들로 나누거나 이 나누어진 부분들을 다시 모아서 원래의 전체로 만들거나 할 수 없는 것이다. (30)


<물질과 기억>은 이 지속이 또한 과거를 현재 속으로 연장시켜주는 기억의 연속적인 삶이라는 것을 논증하며, 이러한 기억의 운동을 통해서 물질과 정신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또한 서로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4)


후설: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길래 사물이 그렇게 있는지를 묻는다.

베르그송: 사물이 어떻게 있길래 우리가 사물을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지를 묻는다.


“들뢰즈는 일자와 다자,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적 관계를 넘어서는 잠재적 다양체 개념, 무와 부정을 비판하면서도 존재와 생성을 종합할 수 있는 긍정의 사유를 베르그송으로부터 발굴하여 계승해나갔다. 무엇보다 <물질과 기억>이 없었다면, 이미지, 잠재성, 지속의 리듬과 강도, 기억의 반복과 차이화 같은 개념들이 없었다면, 아마 들뢰즈의 책들을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46)”


“베르그송이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열쇠는 바로 뇌를 포함한 신체의 기능과 역할이다. 우리의 정신은 왜 물질적 대상들과 접촉하고 그것들에 대한 앎을 얻어야 하는가, 즉 외부 사물들을 지각하거나 기억해야 하는 일이 왜 필요한가, 우리는 왜 외부 사물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거나 즐거움을 얻는가 등등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정신이 물질과 맺는 여러 양상의 관계들은 결국 우리 삶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근본 조건이다.” (59)


<물질과 기억>에서 제기된 문제와 해결 방법


<물질과 기억>의 중심 과제는 기억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토대로 물질과 정신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일상인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물질이 실재한다는 것과 정신이 실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실재들이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존재하며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68)


즉, ‘없다’는 것, ‘비어 있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 기대에 비추어 ‘무시된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고, 진정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부분은 우주 어디에도 없으며 항상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실재는 빈 간격에 의해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 한 연속적 전체라는 것이다. (76)


베르그송에게 지속은 구체적인 존재자의 연속적인 질적 변화와 운동 자체이다. […] 우주 만물은 각자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불가분 한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 지속한다. (77)


기억은 단순한 심리적인 활동이 아니라 존재론적 지속의 역동적 구조를 강조하는 지속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로 연장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개방하는 지속 그 자체이다. 지속이 질적 변화의 연속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과거를 반복하면서 현재를 새롭게 하는, 즉 자기 자신을 반복하면서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기억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의 운동이기 때문에 지속은 상이한 리듬과 속도에 따라 다양한 정도 차이를 허용할 수 있다. (79)


물질은 기억력이 없는 ‘순간적인 의식’과 같아서 동일한 것을 ‘거의’ 반복한다. (79)


정신은 단일하고 정적인 실재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며, 신체적 습관의 수준, 지적 노력의 수준, 꿈의 수준과 같은 상이한 수준들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실재다. (79)


따라서, 정신은 기억의 강도가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물질과의 본성의 차이를 드러내며 그 독자적 실재성을 보유할 수 있지만, 기억의 강도가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물질의 수준에까지 닿을 수 있다. 심지어 정신과 물질은 기억의 강도가 제로인 지점(순수 지각)에서 접촉할 수 있고 일치할 수도 있다! (80)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표상은 그 자체로 실재의 단순한 반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경험’을 형성하는 지각과 기억의 혼합물이다. 지각과 기억은 본성상 다른 것이며, 기억은 결코 지각 이후에 형성되는 약한 지각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본성상 차이에 따라 갈라지는 지각과 기억의 선을 따라서 우리의 표상을 ‘인간적인 경험’ 너머로 확장시킨다. (81)


(물질) 순수 지각 ← 지각 + 기억 → 순수 기억(정신)

(의식적 표상)


<물질과 기억>의 인식론적 해법은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들이 실은 우리의 실천적 관심들과 사회적인 삶의 요구들에 맞춰 선별된 것임을 간파하고, ‘인간적인 경험’으로 전환되기 이전의 실재 그 자체 에로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켜 그 발생적 원천을 향해 넘어가는 데 있다. 지각과 기억에 의해 공간화된 표상을 산출하는 것이 삶에 주의하는 지성의 특징이라면, 이러한 표상의 발생적 근원인 잠재적 실재를 향하여 경험의 장을 확장시키는 것은 바로 직관의 능력이다. (83)


이미지의 라틴어 원인 이마고(imago)는 어떤 것을 닮거나 본뜬 상이라는 의미의 에이콘(eikon)과 상상적 환영이나 가상이라는 의미의 판타스 마(phantasma)를 다 함축한다. 플라톤은 이미지를 원본 실재인 이데아(idea)의 모상이나 가상에 불과한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고, … (87)


즉 이미지는 정신적인 관념과 동일시될 정도로 순수하게 비연장적인 것도 아니고,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될 정도로 순수하게 연장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이미지들, 그것도 끊임없이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총체로 정의한다. 즉 물질은 비연장적인 것과 연장적인 것 사이의 실재로서 불가분 한 연장성을 지닌 연속적인 전체라는 것이다. (88)


따라서 ‘물질=운동하는 이미지들의 총체’라는 등식은 한편으로는 이미지 개념의 존재론적 위상을 관념적 가상으로부터 물질적 실제로 상향 조정시키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물질 개념을 공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속의 관점에서 사유하여 정신과의 접촉 지점을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기초가 된다. (88)


이미지들은 불가분 하게 연결된 전체로서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서로 작용-반작용하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들 간의 상호작용이든,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요소 이미지들 간의 상호작용이든, 모든 이미지들은 필연적인 인과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 같다. (90)


즉 전달된 운동이 지연되고 있을 때, 이미지들의 현실적인 작용이 생명체라는 특수한 이미지의 여과기에 걸려서 즉각적으로 통과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거기에 남겨진 것이 바로 지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96)


외부 사물로부터 발산된 빛이 신체의 막에 걸려 다시 그 빛의 발산 지점이었던 사물 자신 위에서 현상할 때, 비로소 지각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러니까 지각 이미지는 뇌 안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뇌 바깥에 사물들이 있는 바로 거기에서 뜬다. 달리 말하자면, 눈(카메라의 렌즈)이 외부 대상을 찍으면 뇌 안에 그 대상의 표상(사진)이 현상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 이미 사진이 다 찍혀있지만 주변이 너무나 투명해서 아직 현상되지 않았던 것이 뇌라는 감광판에 걸려 그 자리에서 현상되는 것이다. (97)


이것이 바로 <순수 지각>이다. 정신적인 요소를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물질과 물질의 운동만이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차원에서 지각의 출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순수한 지각은 물질의 일부로서 물질 그 자체이다. 물질과 물질에 대한 지각 사이에는 전체와 부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97)


베르그송에 의하면, 고통이라는 정념도 실은 순수하게 의식적인 상태가 아니라, 손상된 부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신체상의 노력, 다시 말해 감각 신경 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운동 경향이다. (99)


기억은 기존에 물질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던 ‘정신’이란 개념을 교정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02)


베르그송에게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암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삶이 전개되는 모든 시간 속에서 지나온 과거 전체를 고스란히 보존했다가 현재의 순간으로 연장하여 적절하게 활용하는 정신의 운동성을 말한다. 현재 상황의 실천적 유용성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거를 현재의 의식으로 연장하는 기억의 운동이야말로 불가분 한 질적 변화의 연속인 정신의 실재적인 지속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행위를 수행하는 실천적 의식의 다양한 수준들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103)


따라서 ‘기억’으로서의 정신이어야만 물질과 정신 사이의 구분과 결합이, 즉 본성상 서로 다르면서도 또한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관계의 본성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103)


정신의 심층인 순수 기억으로부터 온 기억 내용(기억 이미지)과 물질의 일부인 순수 지각(지각 이미지)이 결합함으로써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이 성립한다. 과거를 보존했다가 다시 재생시켜 현재의 지각을 해석하고 행위로 완성시키는 기억작용을 고려한다면, 신체 이미지는 단순히 물질적 연장의 현재적 차원에서 운동을 주고받는 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이 현재로 연장하여 미래로 밀고 나아가는 정신적 지속의 첨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5)


기억의 분류: 습관-기억, 이미지-기억, 순수 기억

따라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현실화의 길을 차단당하는 것이다.(109)


순수 기억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뇌에 저장되지 않고 스스로 존속하는 과거 일반을 말한다. (112)


카메라의 렌즈가 겨냥하는 곳은 과거 일반의 무의식 세계이다. 의식의 줌 렌즈가 침투에 들어감에 따라 과거 일반의 순수 기억은, 마치 뭐가 뭔지 모르게 뭉쳐있던 성운이 점차 개별화된 별들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잠재적인 상태에서 현실적인 상태로 서서히 이행하며 이미지 형태로 현실화하게 된다. (113)


병진 운동은 적합한 기억을 찾기 위해 선택된 어떤 수준의 과거 전체가 나누어지지 않고 통째로 현재의 경험 앞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회전 운동은 이 과거 전체가 아직 응축된 안개구름처럼 분별되지 않는 상태이기에 이로부터 현재 상황에 가장 유용한 개별 기억들을 끌어내고자 하는 운동이다. (114)


순수 기억의 팽창과 수축 정도에 따라, 즉 과거를 현재 속으로 연장하려는 정신의 긴장된 주의력의 정도에 따라, 현실화되는 과거의 수준들도 달라지고 현재를 이해하거나 새롭게 창조하는 수준들도 달라진다. 동일한 대상을 지각하더라도 그 대상에 기울이는 주의력에 강도만큼 확장되었다가 수축되어 현재 속으로 들어오는 기억의 정도에 따라서 대상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체험의 색을 띠게 되거나 아니면 익명적이고 사회적으로 평범한 행위로 연장될 수 있다. (117)


미래를 향하여 과거를 현재 속으로 연장하는 기억의 운동이야말로 정신과 신체를 실체적 구분이 아닌 실천적 운동의 정도 차이로 관계 맺게 한다. (120)


과거는 의식 바깥에, ‘무의식’ 속에 남아있다. 과거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내 삶의 모습, 즉 성격, 말투, 행동거지, 흉터,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내가 살아온 과거 전체의 응축물이며 흔적이고, 나는 사실 굴러갈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눈덩이처럼 이 과거 전체를 등 뒤에 업고서 이 과거가 미는 힘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현실적으로 무용하기 때문에 의식적인 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 그래서 망각되고 억압된 것일 뿐이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123)


‘과거-무의식-잠재적인 것’과 ‘현재-의식-현실적인 것’이라는 본성상 다른 두 계열은 원뿔 도식의 바닥과 꼭짓점처럼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123)


따라서 시간이 연속적으로 흘러간다는 것, 시간이 끊임없는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과거의 방향과 현실적인 현재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분열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으로 존속하던 과거를 수축하여 현재 속으로 현실화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개방한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와 현재는 선형적으로 연속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종합의 이중 관계 속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125)


삶의 시간이 비결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열려 있으면서 늘 새로운 현재로 질적 변화하는 것은 결국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분열과 종합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운동 때문이다. (126)


기억으로서의 지속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운동,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면서 자기 자신의 질적 변화를 산출하는 운동,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 변용으로서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26)


새로운 일반 관념들을 더 많이 형성한다는 것은 결국 습관을 갱신하여 고착화된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만큼 삶의 자유를 더 많이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식은 원뿔 바닥으로 향할수록 이완된 감각 운동성 덕분에 유용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순수한 기억 이미지들을 각각의 차이 속에서 자유롭게 바라보는 꿈 꾸는 정신이 되고, 꼭짓점으로 향할수록 현재의 감각-운동적 상황에 매몰되어 유사한 지각들만을 포착하며 습관적인 행동으로 살아가는 기계적인 정신이 된다. (128)

동일한 현재를 반복하며 진부하고 평범한 물질적 수준의 삶을 사느냐, 아니면 새로운 차이를 산출하며 현재의 질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삶을 사느냐는 결국 잠재적인 과거를 현실화하여 활용하는 기억의 강도와 주의하는 정신의 긴장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129)


연장적인 물질은 과거를 보존하지 않고 무수한 진동들로 그 자신을 반복할 뿐이지만, 긴장된 정신은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 속에 연장하면서 차이를 생성한다. (131)


우리가 1초 동안에 본 영화의 한 장면 속에는 통상 24개의 프레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간 운동이 숨어있는 것처럼, 물질의 엄청나게 긴 역사가 우리 정신의 한 순간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만일 이 수축을 이완시킬 수 있다면, 색깔들의 선명한 차이는 점점 흐려지고 질들은 점점 더 순수한 “내적 연속성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는,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진동들”로 환원될 것이다. (141)


베르그송은 보편적 지속의 형이상학 안에서 물질과 정신의 본성상 차이를 확립하면서도 양자의 수렴과 접속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각을 표상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체적 행위와 운동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은 최근 심리철학과도 공명한다. (152)


<물질과 기억>의 순수 기억과 과거 개념은 정신분석학적 의미와는 다른 무의식 개념을 제시한다. 베르그송의 무의식은 억압된 욕망이나 상처 입은 기억이 아니다. 과거는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현재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풍부한 잠재력이다. 순수 기억의 무의식은 무엇보다 ‘가능성’이 아니라 ‘잠재성’을 사유할 수 있게 한 점에서 중요하다. (161)


기억의 힘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고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망각과 선별을 거쳐 과거를 현실화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키는 창조성에 있다. 과거를 수축하여 현재로 연장하는 기억의 강도에 따라 과거 전체는 상이한 정신적 수준에서 반복되면서 현재적 삶의 질적 변화를 산출한다. (164)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가 ‘부동적 단면+추상적 운동’이 아니라, ‘생성의 역동적 단면’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자연 지각의 발생을 설명하면서 무중 심의 전체로부터 어떻게 중심화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들뢰즈는 거꾸로 중심화된 것이 어떻게 탈 중심화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 지각의 발생을 설명하였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총체로부터 들뢰즈는 중심화된 자연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 탈중심화되는 영화적 지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연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적 지각, 즉 카메라 지각의 독특성은 ‘탈중심성’과 ‘속도’에 있다. 카메라의 지각은 인간 신체를 중심으로 그어지는 자연 지각의 경계를 넘어서 고정된 시점에서 벗어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 지각의 속도보다 더 빠르거나 더 느리게 사물을 포착할 수도 있다. (168)


예컨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 보라. 일명 ‘불릿 타임(bullet time)’으로 불리는 그 장면은 360도 회전 숏으로서 1초에 12000 프레임을 수축하여 넣었다가 정상 속도로 풀어낸 고밀도 슬로 모션 장면이다. (168)


인간적인 지각의 리듬과 속도 그 이하와 이상에서 실재하고 있던 다른 지속들과 운동들을,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육안으로는 감지되지 않았던 운동과 지속을 카메라는 지각할 수 있다. 따라서 카메라가 지각한 세계,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세계는 자연 지각으로는 볼 수 없던 이질적인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세계는 탈인간 중심적이고 비표 상적인 경험세계, 즉 자연 지각으로의 중심화와 축소된 선택 이전의 탈중심화된 우주,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열린 전체를 보여줄 수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의 과제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 즉 지각 안으로 깊이 들어가 지각 자체를 확장해야 한다는 임무를 영화는 수행할 수 있다. (169)


영화의 운동-이미지는 인간적 실용성에 의해 축소되지 않은 물질의 운동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자연 지각의 익숙한 코드를 위태롭게 하며, 수용되지 않던 낯설고 이질적인 것, 습관적 사유의 바깥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영화야말로 오히려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실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유 방식으로 적합할 수 있다.(170)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이미지 개념을 가지고서야 영화를 철학적 사유의 도구로 만들 수 있었다. 베르그송은 현실적 유용성에 따라 삶에 주의하는 지성의 공간화된 사유 바깥에서 시간 실재, 즉 생성과 지속의 우주 그 자체를 직관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했는데, 바로 그 직관의 방법을 영화가 실현할 수 있다고 들뢰즈는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허구적 가상이나 상상의 오락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습관적 사유에 의해 가려져 있던 역동적인 실재를 보여주는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다. 영화의 이미지야말로 운동하는 실재, 시간, 생성, 지속을 보여준다. (170)


그러니까 결국 정신적 삶에는 다양한 색조들이 있으며, 우리의 심리적 삶은 우리의 삶에 대한 주의의 정도에 따라서, 때로는 행동에 더 가깝게, 때로는 행동으로부터 더 멀게, 다양한 높이에서 영위될 수 있다. (180)


상상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의 기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로 생생하게 살아나려 한다. 그러나 그 역은 사실이 아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이미지는, 단지 내가 그것을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이르게 한 연속적 과정을 따르면서 그것을 과거 속으로 찾으러 갈 때에만, 나를 과거로 다시 데려다 놓을 것이다. (228)


결론 : 정신은 물질로부터 지각들을 빌어와 거기서 자신의 양분을 취하고, 자신의 자유를 새겨 놓은 운동의 형태로 물질에게 지각들을 되돌려준다. (276)


이렇게 결국 책을 따라 읽으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혹은 기억하고 싶었던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이 책을 덮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을 다양한 운동성과 결정 불가능으로, 긍정적으로 사유한 베르그송의 책은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의 앞서 읽는 1단계의 책이 아니라 넘어선 엄청난 책으로 여겨진다. 지난 학기 과제에서 주요 키워드가 '기억'의 변증법이었는데, 그때 베르그송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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