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참견시점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내가 막 지나온 마을의 거리를 묘사하는 듯 낯익다. 지금 누군가 그 길을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달려가 맞이하고 싶기도 하고, 모른 체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요새 젊은이들은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는데.... 일단 욕먹을 각오로 이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어본다.
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것. 우리는 그것을 익명성이라고 부른다.
an(=without) onym(=name) ity, 무명성, 무기명성으로도 번역되며 도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사전은 정의한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정신적 교감은 편하다. 나를 잘 아는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의 관계를 비교해 보면 더 그렇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서 1주일 아니 넉넉잡아 한 달 정도는 이 익명성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이웃과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며 신원조사에 가까운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으면 더 이상 익명성의 혜택은 포기해야 한다.
쇼코는 원형의 익명성과는 다른, 변형된 형태의 익명성을 원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속을 열어 보이지 못하는 대신 살을 부딪치며 만날 필요가 업는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자신의 삶으로 절대 침입할 수 없는 사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어야 쇼코는 그를 친구라 부를 수 있었다.
쇼코는 자신을 잘 모르고 일정한 거리 두기가 가능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연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은 것이다. 소유가 한국에 돌아올 때 바라본 현해탄은 반짝거렸다. 멀리서 본 사물은 티 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그렇다. 멀리서는 흠도 상처도 더러움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대상은 사뭇 오점으로 얼룩져 있다. 가까이에서 본 쇼코의 삶도 상처투성이였다.
익명은 나를 현실에서 잠시 해방시킬 수 있다. 그들은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쉽게 알아본다.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굴레에서 벗어나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영화 접속의 전도연과 한석규처럼 말이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같은 시간, 같은 노래를 듣고 하나로 연결되었다.
채팅창에서의 짧은 대화를 통해 사랑의 상처와 외로움을 나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그들의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들은 온라인 속,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와 생각을 나누고 위로받고 응원하며 감정을 공유한다.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 간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궁정 음악가로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아름다운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등을 작곡하며 시대의 획을 그었다. 이를 바라보는 이가 있으니, 바로 안토니오 살리에르다.
빈의 궁정 작곡가로 최고의 사회적 명성을 얻으며 베토벤, 슈베르트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살리에르에게 모차르트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았고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음을 괴로워했다. 심한 자괴감 속에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빠뜨렸다. "주여 위대한 작곡가가 되게 해주세요." 그의 기도는 간절했지만 모차르트 같은 천재성은 발현되지 않았다. 훌륭했던 살리에르의 삶은 자아 분열에 이르렀다.
누구나 젊은 한 날, 질투로 괴로웠던 적이 있지 않은가?
나보다 덜 노력하고 더 많은 성과를 거두는 이들, 그들의 결과물은 어쩌다 걸린 운이고, 그들은 대단한 빽을 가졌을 거라고 치부했다. 내 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전장의 전리품처럼 늘 대단했다.
그래, 억지웃음 한 번으로 그 낯부끄러운 감정을 날려보내자.
질투란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 아닌가, 나의 질투는 때가 차면 상대에 대한 칭찬과 축복으로 바뀐다. 그건 나를 위한 태세 전환이다. 괜찮다. 나를 버티게 해주는 나름의 삶의 방식이므로....
소유가 영화판과의 이길 것 같지 않은 지리멸렬한 싸움에 지칠 무렵, 할아버지는 소유를 찾아와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이렇게 큰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까짓것 다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이 날 이후 소유는 영화 일을 정리한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진심이었다. 수렁에 빠진 손녀를 건지려는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살리에르처럼 질투로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든, 나처럼 상황 파악 후 재빨리 인정하고 차라리 추종자의 길을 걷든, 소유처럼 주변 사람의 사랑과 인정으로 마음을 바꾸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책을 읽는 내내 쇼코의 미소가 궁금했다.
슬쩍 따라가 보았다.
* 사실은 부끄럽지 않은데, 습관적으로 부끄러운 듯 말한다.
* 정말 우스워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를 편하게 하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 병원 팸플릿 속 쇼코는 눈과 입을 있는 대로 과장해서 활짝 웃고 있었다.
* 출국장으로 들어가던 날, 쇼코는 예의 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끝내 쇼코의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성장소설에 나오는 작은 변화, 가능성 한 조각쯤은 던져주지 않을까 했다. 할아버지 편지를 전해주고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친 쇼코는 다시 어린 시절, 그때처럼 예의 바른 웃음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가능한 익명의 세계로 다시 돌어간 것일까?
우주의 가장자리,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서있는 젊은이들아,
뱃속에 뱀이 100마리가 든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들지?
가야 할 푯대를 누가 내게 보여준다면 그쪽을 향해 힘껏 달릴 수 있을텐데...
선택지가 많은 문제가 어려운 법이긴 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는 말하지,
치매의 증상은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마다 "하루 일찍 오셨네요. 내일이 출발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기분이라고. 다음날도 다음날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서 듣는다. "하루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영영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게 치매라고.
젊음은 우주의 한가운데에 이르지 못할까, 빌딩으로 가득한 도심에 이르지 못할까,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곧 알게 된다.
우주의 가장자리도 멀리서 보면 그 중심이라는 걸, 네가 서있는 그곳이 도심의 한복판이라는 걸 말이다.
다른 누군가는 너희들이 서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 질투로 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지금 그곳에서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