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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l 08. 2023

곧 죽어도 뜨아지

결정장애자의 슬픔과 기쁨


테이블 위에 메뉴판도 사방 벽에 빼곡히 적힌 메뉴들도 별 소용이 없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들르는 단골이고 이 짓도 사 년 차를 넘기지만 내겐 늘 처음이다. 


거룩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적어도 의자에 앉자마자 주문을 시작한다. 밥심으로 산다는 강 부장은 잡채밥을, 나머지 일행들은 높은 적중율로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한다. 그들은 대게 49대 51이거나 51대 49로 간택되는데 어느 날은 짜장면, 어느 날은 짬뽕이다. 다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누구도, 며느리도 모른다. 피크 타임에 식당 직원들의 눈빛은 사뭇 결연하다. 설렁한 망설임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다. 최종선택 3초 전까지 미결정상태인 나는 초조하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하나둘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고 있다.


짬뽕이요.


짜장이요.


쾌변처럼 시원하다. 저들은 처음부터 짬뽕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백만 년 전부터 짜장면을 먹기로 작정한 사람인 것처럼 술술 입에서 내뱉는다. 저들과 같이 타고난 기호가 없는 나는 막막하다. 미리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시작부터 다른 출발, 매번 무의 상태가 되어 선택이라는 높디높은 벽에 부딪히는 나는 더 더 열심히 준비했어야 한다. 잠을 줄이고 멍 때리지 말고 고민했어야 한다.


무대의 핀 조명들이 하나씩 꺼진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나를 향해 밝은 빛 하나가 촘촘하게 다가온다. 성실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해서요,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하찮은 문제니까. 이깟 일에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세상 부끄러우니까. 왼발이 먼저 나오는지 오른발이 먼저 나오는지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것처럼 이 또한 만 가지 일 중 만 번째도 못 되는 그런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은 척, 생각했다는 생각도 잊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김 주임이 겉옷을 벗으며 귀찮은 듯 성의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짜장이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짜장 다음에는 뭐가 나을까. 앞사람의 선택에 다음 사람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까. 통계적으로 말이다. 심리적 동일성, 아니면 차별성일까. 그렇다면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춘다.


짬뽕이요.


그래, 차별성이다. 어차피 둘 중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다. 김 주임의 선택을 기준으로 그와 다른 결정을 하겠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앞으로도 앞사람과 다른 메뉴를 선택하는 방식을 고수할까. 그건 너무 의존적인 태도 아닌가, 만약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아, 모르겠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밀려드는 허기를 붉은 짬뽕으로 채웠다.


북성각을 나와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신입사원 J가 스타벅스 앞에서 멈췄다. 커피를 쏜단다. 


아아.

아아.

아바라.

아아.


J가 나를 바라본다. 


뜨아지.


한여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향해 일초의 망설임 없는 나의 쿨 선택이었다. 


휴~ 

시원하다.

© eommina,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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