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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n 21. 2024

싱어게인, 무명가수가 이름을 찾으면

나를 정의하는 한 줄 문장이 필요해

임재범, 윤종신, 백지영, 김이나 등이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을 본 적이 있다. 대중들에게 얼굴과 이름이 낯선 가수들, 세상에 드러난 적 없는 무명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열창을 했다. 이들은 번호로 호명되고, 단 한 문장으로 자신을 설명했다. '나는 기타에게 미안한 가수다', '나는 우산이 싫은 가수다.', '나는 전주로 뜬 가수다.' 같은. 나는 그 한 문장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며 노래를 들었다. 

싱어게인 3  무명 가수 전 (사진제공, JTBC)

경연에서 탈락한 참가자의 얼굴에 아쉬움이 짙다. 마지막 무대를 마친 참가자의 이름이 드디어 빈칸에 채워졌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다. 그들은 존재감 없는 무명 가수에서 마침내 이름 있는 가수가 되었다. 심사위원의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받으며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렇다면, 나를 정의하는 한 문장은 무얼까.


'나는 기도하는 두 아들의 엄마다.'

이 문장에 덧붙여 세상에 나를 표현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작은 바람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좋고, 가까이 또는 멀리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을 쏟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보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어디 가세요, 이 동네 사세요, 빵집 새로 오픈했는데 알려드릴까요, 라며 말을 걸고 싶고, 식당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주문 전이면 하나씩 시켜 나눠먹을래요, 라거나 먹고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그거 맛있나요, 다음에는 저도 먹어보려고요,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다. 아무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있는 게 시간이고 수다가 그리운 날에도 나는 세상 바쁜 사람이 되어 빠르게 걷는다. 내 밖과 안에서 양극과 음극이 꼭 그만큼씩 전류를 보내 나는 언제나 숫자 0이 된다. 어떠한 자극에도 무덤덤한. 


그런 평범한 일상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줄곧 꿈을 꾸었다. 언젠가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향해 나만의 펜촉을 세우는 작가가 되는 꿈을.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잘 벼려진 펜을 주저 없이 휘날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마침내 맞이한 첨예의 시간, 결정의 순간, 나는 펜 대신 그만 밥주걱을 쳐들고 말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사정없이 푸고, 연타로 우묵한 국자에 푹 우린 뭇국을 푸고, 프라이팬 위에서 긴 젓가락을 지휘봉처럼 휘둘렀다. 아이들은 집밥보다 배민이 실어다 준 엽떡이나 바삭 치킨을 좋아했다. 단짝 가득한 메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손수 차린 음식이 밥상을 점령할 때면, 나는 인류를 선으로 인도한 구원자가 되고,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흐뭇한 농부가 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 여름날의 눈발처럼 노동은 쌓이는 법이 없다. 매번 시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럴 필요 없다고, 너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제 버릇 남 주지 못했다. 오십 년이 훌쩍 넘도록 몸에 밴 익숙함,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도전의 순간마다 내 몸에 맞는 익숙함이 나를 끌어당겼다. 익숙함과 도전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지난해 에세이 <집이라는 그리운 말>이  출간됐다. 성격 좋고 인심 후한 이웃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올해 <한국 소설>에서 단편소설 '감기'로 한국소설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라는 칭호도 얻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라는 두 글자에  글 쓰는 작가 '미진'을 더했다. 이름을 얻었고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 조금 더 길어졌다.

오랜 시간 나는 가족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쓱쓱 밥그릇 긁는 소리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껴왔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루를 잘살았다는 희열마저 솟았다. 한편으로 내가 가진 지극한 존재의 평범성에 절망하기도 했다. 이런 치명적인 결함에도 나는 여전히 밥을 하며 이야기를 짓고,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시청하는 ‘kbs 6시 내 고향’에서 글감을 찾고, 설거지를 하며 마침내 뾰족한 펜이 휘두를 역습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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