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기만 하면 다 견디는 거다
최장수 드라마 mbc 전원일기에 나온 갓난아기 복길이는 자라서 시집을 가고, 할머니 분장으로 유명한 복길 할머니 김수미는 후반으로 가면서 제 나이를 찾았다. 파릇하던 젊은 배우는 어느새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김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청년회장인 유인촌은 문화체육부 장관이 되고 군청 산림과 과장이던 김용건은 늦은 나이에 손주를 봤단다. 김 회장은 여전히 '한국인의 밥상'을 받으며 전국을 누비고, 읍내에서 노래방을 하던 마을 청년 응삼(박윤배)이와 양촌리 노인 삼인방 중 한 명인 정태섭 어른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서둘러 지나갔다.
kbs ‘꽃보다 남자’에 금잔디, F4(이민호, 김현중, 김범, 김준)이 있다면 전원일기에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G3, 할아버지 3인방이 있다. 김 노인, 박 노인, 이 노인이다. 보통 "김가야, 박가야, 이가야"라고 서로를 부르고 불린다. 모든 에피소드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마을 노인들이다. 양촌리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지푸라기를 꼬며 마을 돌아가는 소식을 나눈다.
전원일기는 주연들만의 잔치가 아니다. 조조연급인 G3가 주인공이었던 토정비결 에피소드가 문득 떠오른다. 겨울철 마을회관에 모인 청년들은 무료하다. 마땅한 G일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씨 착한 응삼이가 토정비결 책을 얻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신년 운세를 알려준다.
때마침 그곳에 들른 박 노인이 당신의 운세를 봐달라며 사주를 일러주고 간다. 박 노인의 운세를 본 응삼이 자못 심각하다. 이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걱정이 많다. 아주 안 좋단다. 옆에 있는 친구들도 아무리 사실이어도 나이 드신 분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잘 못하면 병나신다고 좋게 에둘러 말하라고 한다. 고심하던 응삼이 책에서 고른 좋은 문구를 박 노인에게 알려준다.
"할아버지, 올해 운수가 아주 좋으세요. 고운 옷을 입고 멀리 여행 가신대요."
젊은 응삼에게 먼 곳으로 가는 여행은 해외여행이었고, 그야말로 최고의 운세였다. 이를 알게 된 할아버지가 시름시름 앓는다. '내가 곧 죽나 보다. 올해를 못 넘기겠구먼. 멀리라면 저승인 게지.'라며 기운을 못 차리신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응삼이 노인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할아버지 올해 운세가 너무 나빠서 제가 지어낸 거라고. 드디어 박 노인의 진짜 운세를 알려 준다.
"사기를 당하신대요."
"아이쿠, 괜찮다. 사기야 당할 수도 있지."
"올여름에 다치신대요."
"뭘 그걸 같고 그러냐. 다치면 고치면 되지."
어떤 나쁜 문구를 읽어 줘도 박 노인은 다시 살았다는 기쁨에 싱글벙글이다. 두 눈에 기쁨의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괜찮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면 다 견딜 수 있는 거다.
나 역시 병원 진료실 앞에 앉아 검진 결과를 기다릴 때면 바짝 마른 대추가 된다.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수영장 튜브처럼 부풀어 둥둥 떠다니곤 했다.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안도의 웃음을 짓는 박 노인을 보며 나도 덩달아 웃었다.
가난한 집안의 외며느리로, 더 가난한 친정 부모 생각에 애달픈 복길 엄마는 마음이 힘들 때마다 빨랫감을 들고 냇가로 간다.
'추운데 세탁기로 하지 뭐 하러 나가냐?'
'기계로 빨면 속 시원하게 빨아지나요. 흐르는 물에 해야 개운하죠.'
밖에 나갈 구실이 필요하다. 마을 아낙들이 냇가에 모여 한바탕 수다로 시끄럽다. 빨랫방망이로 소창을 두드리고 커다란 이불을 발로 질겅질겅 밟는다. 시집살이의 설움을 덜고 쌓인 스트레스를 날린다. 이들은 별 것도 아닌 일에 배꼽을 잡으며 웃고,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물장난을 한다.
부산하게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내고 마음 맞는 사람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예쁜 브런치 카페에서 남이 차려준 음식을 먹는 요즘과 닮았다.
전원일기 방영 시간이다. 여든이 넘은 시부모님과 남편이 오늘도 티브이 앞에 앉아있다. 젊은 친구들이 봐야 하는 프로그램이고 대학교 교양수업에 넣어야 한단다. 어른 앞에서 무릎을 조아리는 마을 청년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들,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이웃들이 아련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나 보다. 나 역시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시절 정서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기도 했다. 한편 작가가 전하는 가족의 모습,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자에게 강요되는 지나친 희생과 순종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드라마의 중심축인, 최불암과 김혜자가 연기한 김 회장과 그의 부인은 효성이 지극하다. 조석으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잠이 드실 때까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 드리고 다리를 주무른다. 틈만 나면 부인에게 어머님께 조금 더 신경 쓰라고 말한다.
궁금했다. '며느리 김혜자의 부모님은 안녕하신가. 오빠나 남동생에게 섬김을 잘 받고 계셔서 딸인 김혜자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지. 효는 아들의 몫이고 시집간 여자는 남편의 부모를 성심껏 모시면 되는 것인지. 그래서 그 시절 아들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인지. (후반부에 김혜자가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애달프게 그리워하는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다행이다.)
김 회장 댁 큰며느리 고두심은 그 시절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작가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농사짓는 집 장남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신의 꿈을 미뤄뒀다. 나는 큰 며느리 고두심을 보면 마음이 쓰였다. 대가족 살림을 하면서 언제 책을 읽고, 맘껏 글을 쓸 것인가. 증조모, 시부모, 효자 남편, 얄미운 동서, 반항기에 접어든 금동이, 당신 집 드나들듯 드나드는 복길 할머니,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 도무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어떻게 살아냈을까.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죽음 직전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을 통해 말한다.
공허하고 힘이 쭉 빠지고 피로한 느낌이 들면서 입 안에 담즙처럼 쓴맛이 돌았다. 이제 드디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어떻게 되었건, 또 앞으로 어떻게 되건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p.392
죽음은 모든 문제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살아있기에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이 대목에서 박 노인의 말을 힘껏 떠올려 본다. ”괜찮다. 살아 있기만 하면 다 견딜 수 있는 거다. “
현실은 만만치 않다. 나는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는 냇가도, 스타벅스도, 잘 차려진 브런치 카페도 아닌,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글을 쓰며 속엣말을 한다. 동네방네 소문이 날 일도, 없는 돈을 축낼 일도 없어 좋다. 괜찮치 않은가. 살아 있으니 견딜 수 있고 좋은 날도 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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