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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n 28. 2024

TV 온스타일, 아메리카 넥스트 탑모델은 누구?

비현실적인 것이 주는 위로

"내 앞에 두 명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서 있는데 내 손에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여전히 미국의 차세대 톱 모델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소녀를 나타냅니다."


"I have two beautiful young ladies standing before me, but I only have one photo in my hands, and this photo represents the girl that is still in the running towards becoming America's Next Top Model."


미국 The CW에서 방영된 오디션형 리얼리티 프로그램, 도전! 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에서 타이라 뱅크스가 마지막 합격자를 호명하기 전 하는 말이다. 그녀는 미션을 이어갈 모델의 이름을 부른다. 두 후보가 최종 선택을 기다린다. 간절한 눈빛이다. 불리지 않은 한 명은 짐을 싸서 숙소를 떠나야 한다.


경쟁에서 도전자를 탈락시키는 수많은 프로그램들 중 하나였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후보들 간 갈등을 조장하고 질투하게 만들었다. 심사위원들은 주관적이고 판정은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 진정성이 의심되는 문제적 프로그램이었다. 


늦은 밤, 케이블 TV 온스타일에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을 나는 극한의 육아 기간에 시청했다. 현실과 지독히 멀어 보였다. 자유로운 십 대, 이 십 대의 젊은이들이 탑모델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널을 뛰었다. 티브이에서나 볼 수 있는 우상이 멘토가 되어 그녀들에게 쓴소리를 거침없이 해댔다. 후보들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전화 부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힘들다고, 포기해야겠다고. 전화기 너머에서는 엄마가 딸에게 용기를 줬다. 딸아, 너는 아름다워, 할 수 있어. 


언제 깰지 모를 두 아이를 재우고 캔 맥주 하나를 마시며 가장 어설픈 누군가를 응원했다. 타아라 뱅크스가 프로그램 마지막에 언급하는 몇 문장에서 엉뚱하게 위로를 받았다. 너는 'beautiful young lady'야. 너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어. 그러니 밖에 나가서도 최선을 다해. 타이라는 떠나는 모델을 안아주며 따뜻하게 조언했다.


현실이 힘들수록 비현실적인 것이 차라리 나았다. 잠깐이라도 내가 머무는 시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듯하다. 그즈음의 나는 지쳤고, 티아라 뱅크스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kbs연예가 중계에서 본 모델 킴 카다시안은 한쪽 골반에 아이를 올리고 긴 팔로 감싸 안았다. 내한 한 미란다 커도 빅 사이즈 클러치 백을 들은 듯 아이를 골반 위에 걸치고 활기차게 걸었다. 골반이 발달한 서양 사람들에게 적합한 아기 안는 방법이었다. 내 육아는 매일 진땀 한 바가지인데, 저들은 육아마저 시크했다.


도구를 만드는 호모 파베르, 공작인(工作人) 답게 육아를 돕는 용품 역시 발전했다. 다양한 형태의 슬링, 아기띠, 힙시트 아기띠 같은 신문물들이 마냥 신기하다. 나는 포대기가 최고인 줄 알고 그 똘똘한 쓸모를 사랑했다.


포대기에서 잠이 든 아이는 눕힐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잘 수 있다. 널찍한 포대기는 요가되고 포근한 이불이 된다. 침구인 동시에 이동 도구였다. 더 좋은 건 포대기를 두른 아기 엄마에게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두 손이 있다는 사실이다. 양손에 짐을 들 수도, 빨래를 널 수도, 핸드폰을 받을 수도 있다. 포대기의 매직이다. 


아이 둘을 키우면 포대기 정도야 쓱 두를 것 같지만 그것 역시 기술이 들어가야 했다. 제대로 정확한 위치에 터를 잡지 않으면 아이는 불편해서 뻗대고 얼마 못 가서 슬슬 흘러내렸다. 친정 엄마가 아이를 업으면 아이는 세상 편한 승차감에 노곤해져 한쪽 귀와 포동한 볼을 대고 깊은 잠에 빠졌다.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자식을 키우고 대가족 살림에 조카들까지 업어 키운 엄마의 등은 아이의 숨결로 길이 났나 보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속담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되어 내가 아이를 업었는지 아이가 나를 업었는지 모르는 경지가 아닐까. 


아들은 내가 업으면 인상을 찌푸리고 몸부림을 쳤다. 아이가 떨어질까 내 몸은 점점 앞으로 구부려지고 아이는 흡사 말에 탄 마부가 되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다시, 다시 업었다. 점점 아이와 단단하게 밀착하는 법을 터득했다. 

박수근, 길가에서 '아기 업은 소녀'

눈감고도 포대기를 두를 즈음, 똑딱 플라스틱 버클이 달린 아기띠로 진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자신을 조이던 모든 것을 툭툭 털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부바’ 해도 달려오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갔다. 걷다 넘어지고 또 걷다 넘어졌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아이. 웃으면서 다시 걷는 아이. 실패가 두려운 엄마에게 다시 해보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아이였다. 황현산에게 밤이 선생이듯, 경력 단절로 영영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막힐까 봐 두려운 내게 아이는 선생이고 모델이었다.


TV 온스타일 'America's Next Top Model' 진행자의 말에 뭉클하고,  kbs 연예가중계 해외 연예 코너에서 아기를 허리춤에 안고 파워 워킹을 하는 모델을 보며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나는 힘든데 너희는 왜 멋지니, 뭐 그런 심정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질적인 것이 주는 잠시 잠깐의 힐링, 다이어터가 먹방을 보는 느낌에 가까웠다.


세상이 두려운 엄마에게 도전하는 삶의 모델이 되어 준 아들과 티브이 속 비현실적인 모델을 보며 황무한 땅에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비를 흠뻑 맞히고 햇빛을 쏘였다. 'My Next Top Life'를 꿈꾸며.


#연예가중계

#온스타일

#모델

#아기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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