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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n 14. 2024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결혼식의 하객이었다

세상을 보여준 작은 상자

미련 곰탱아, 넌 네 살 타는 것도 모르냐. 널 어쩌면 좋으니.


  추운 겨울 밤, 군고구마처럼 타들어가는 방 아랫목에서 소설책을 읽던 나는 사정없이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옆에 있던 언니는 말리기는커녕 맞아도 싸다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렇게 재밌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한쪽 엉덩이를 이쪽저쪽 들썩이며 책을 읽었고 읽는 리듬을 끊고 싶지 않아 꾹 버텼다. 이런 일화로 나의 독서력이나 책에 대한 열정을 짐작한다며 그건 오해다. 어릴 적 제법 괜찮은 떡잎을 보인 위인이나 학창시절 스타성을 인정받아 연예인이 된 이들의 스토리와도 무관하다. 차갑고 뜨거운, 밝고 어두운, 달고 쓴, 거칠고 부드러운 감각이나 통점이 두터워 느리게 느끼고 무디게 반응했을 뿐이다.


  세상은 내게 대책 없이 컸다. 그 크기가 가늠이 안 돼서 어디 한 번 해보자며 포부를 갖거나 최선을 다하면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지 못했다. 아무리 달려도 길은 이어졌다. 내가 사는 마을을 벗어나면 낯선 동네가 나왔다. 그 동네를 지나면 또 다른 동네가 나올 터였다. 9시 뉴스에서는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이 나와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빠르게 말을 했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몇 배는 더 광활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77배, 미국은 45배나 된다고 했다. 까마득했다. 나는 세상 앞에 똥덩어리를 구르며 평생을 사는 쇠똥구리, 커다란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기를 무한 반복하는 시지프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아니 개미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성큼 코앞에 있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꾀병을 부렸다. 두꺼운 요를 들추고 밤새 고인 방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고는 갸냘픈 목소리로 앓는 시늉을 했다. 이불 속 안락함을 사수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만의 바람이었다. 엄마는 이불을 홱 들추고 빨리 일어나 씻고 학교에 가라며 등을 밀었다. 열린 방문으로 칼바람이 무차별 들어왔다. 평화는 침범 당했고 나는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느릿느릿 항복 자세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아침 공기 저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숫대야와 노란 다이얼 비누가 놓여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눈을 반쯤 뜨고 그것들을 아득히 바라봤다. 두 걸음이면 닿을 곳이 멀기만 했다. 체온이 바깥 공기에 익숙해지고 더운 물이 식어간다는 데 생각이 미칠 즈음 후다닥 수돗가로 갔다.


  나의 하루는 대체로 그렇게 시작됐다. 남들도 나처럼 사는지, 다른 무엇이 있는지, 동화책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실에도 존재하는지, 작가라는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라 상상 속에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가 결혼을 했다. 해군 제복을 입은 찰스와 금빛 단발머리에 크림색 러플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의 결혼식이 전 세계에 생방송되었다. 오르간 연주가 런던 성 바오로 성당 주위에 물결처럼 퍼졌다. 책상 앞에 앉아 마지못해 방학 숙제를 하던 그 시간, 영국의 대 성당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하던 숙제를 멈추고 티브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작가가 꾸며낸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위대한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환상적이었다. 내 눈앞에 비현실적인 장면, 상상 이상의 장면이 펼쳐졌다. 현실은 베일에 싸인 상상 이상의 세계일지 몰랐다. 그 후 나는 자주 상상하고 흠뻑 비를 맞은 나무가 물기를 머금듯 상상을 더해 갔다. 


  자물통이 달린 일기장이 필요했다. 남녀 간의 이야기는 함부로 내보여서는 안됐다. 그때 내 소설에는 왕자와 공주, 갈기를 나부끼는 말, 성 바오로 성당을 닮은 궁전이 자주 등장했다. 지금은 어떠냐고. 일관되게, 가끔은 호되고 지독하게 시간의 매를 맞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상상하고 이야기를 짓는다. 하지만 더 이상 왕자와 공주,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말, 화려한 궁전은 나오지 않는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이웃과 여전히 모자란 내가 주인공이다. 짠 내 나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우리의 일상과 뿌연 웃음을 쓴다. 서로에게 따뜻한 시선을 두고 서툰 헛발질을 응원하며 장단 맞추는 것만큼 신나는 일도 없으니까.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결혼식을 보며 그들의 앞날을 축복한 지 16년쯤 지났을까. 9시 뉴스에서 다이애나 비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를 실은 관이 왕실 기병대와 근위대의 호위 속에 7마리 말이 끄는 포차에 실려 영결식이 진행될 웨스터 민스턴 사원으로 갔다. 영국 시민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나는 티브이를 보며 꿈을 꾸고 상상을 하고 사람 사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알았다.

#공감에세이

#글쓰는이유

#상상

#글쓰는이유

#성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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