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찌질할래
“내일이 시험인데, 오늘은 일찍 자야지.”
“네, 엄마.”
나는 내일 시험 보러 간다. 어디로? 어디지? 두서너 달 전, 접수처에 접수를 하고 접수증을 받았다. 접수증에는 해당 번호 지원자가 시험을 볼 장소가 인쇄되어 있다. 은성 고등학교. 그곳은 은성구에 있을 것이다. 지정된 장소 아래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또렷했다. 거실 탁자 위에 놓인 검은색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 전화기의 동그란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돌렸거나, 숫자 버튼을 꾹꾹 눌렀거나.
(02) 789-0123-4567
어둠을 뚫고 통화 연결 신호가 은성 고등학교를 향해 내달렸다. 신호음이 계속되었다. 당직 교사가 있을 텐데... 각층 교실을 점검하고, 복도 창문의 잠김 상태를 확인하고, 시설물 확인대장에 사인을 하느라 전화 벨소리를 듣지 못할 터였다. 나는 당직 교사의 동선을 상상하며 느긋하게 신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당직자가 당직 업무를 마치고 당직실에 들어 올 시간을 가늠했다.
안녕하세요. 은성 고등학교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나는 '내일 그곳에 시험을 치르러 갈 사람인데요, 그곳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볼 것이었다. 그가 매뉴얼대로 찾아오는 방법을 설명하면 나는 잘 메모한 후 내일 아침 그곳으로 가면 될 것이었다. 30분 정도 일찍 출발하면, 조금 헤맨다고 해도, 시간 안에 입실하는 건 문제 없다.
따르릉따르릉, 자전거 경적 소리와 동음이의를 가진 전화 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지침도 없이, 밤새 울릴 태세였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학교 측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 번호는 학교 대표전화가 아닌 행정실 번호로 당직실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다. 당연히 행정실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뒤다. 자신의 업무를 마친 당직자가 티브이를 보거나 소파에 누워 시간을 때우는 대신에 학교 운동장을 돌거나 철봉을 하며 건강관리를 하는 중이므로 전화를 받지 못한다.
유추되는 이유들로 나는 통화에 실패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내일 갈 곳을 모른다. 안방 불이 꺼졌다. 백수 딸의 합격을 바라며 모친은 오늘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나의 나태를 가리기 위해 재빨리 방의 불을 껐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은성동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목적지를 모르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발끝을 곧추 세우고 캄캄한 거실로 나갔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창 너머 거실 바닥에 깔린 붉은색 카펫 모서리 한쪽을 밝혔다. 그 불빛에 의지해 전화기를 들었다.
(02) 789-0123-4568
나는 마지막 숫자 하나를 다르게 눌렀다. 7이 아닌 8.
관공서나 기관은 전화번호가 여럿이기도 하니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 벨이 울렸다. 벨소리가 경쾌했다.
“여보세요.”
관등 성명없는 여보세요, 라면 가정집이 틀림없다. 예상이 빗나갔다. 기대는 무너졌다. 하지만 끊을 수 없었다. 나는 누구라도 붙들고 매달려야 했다. 대략 50, 60대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은성 고등학교 아닌가요?”
“아닌데요. 잘못 걸었...”
나는 그의 말을 재빠르게 가로챘다. 할 말이 있으니 끊지 말라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죄송한데 거기가 은성 고등학교랑 가까운가요?”
“네?!...”
“제가 내일 은성 고등학교에 가서 시험 보는데 거기가 어디인지 몰라서요.”
늦은 밤, 잘못 온 전화가 유쾌하지도, 젊은 여자의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가 궁금하지도 않은 남자가 말을 잃었다. 한밤에 걸려온 이상한 여자의 전화를 당장 끊고 싶은 남자가 분노를 누르며 말했다.
“거긴 은성역 앞이죠. 여기서 멀어요.”
뚝, 뚜뚜뚜......
남자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끊긴 전화기를 붙든 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창 너머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빨간 카펫 모서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연신 몸을 접었다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