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수의 마음
수학은 아득했다.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해의 영역에 가닿지 않았다. 착지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멀리뛰기 선수였다. 어쩌다 돈오점수를 외칠 때면, 99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은 곰이 마지막 하루를 버티고 마침내 맞이한 백 일째 밤의 환희를 맛봤다, 선을 삐죽삐죽 넘긴 그림에 검은색 굵은 테두리를 두른 듯 세상이 명료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선생님의 설명은 대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워 조용히 포기하곤 했다. 미지의 세계로 넌지시 넘겼다. 수많은 개념들이 아무런 파동도 없이 나를 스쳐갈 때면, 두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번쩍 드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짝수는 짝이 있어 외롭지 않아 보였다. 둘이 모여 짝꿍이 되었다. 남겨진 홀수는 홀로 외로웠다. 선생님의 선창에 맞춰 노래가 시작됐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눈도 감지 말고 웃지도 말고 움직이지 마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춤추던 아이들이 일제히 멈췄다.
“6”
선생님의 외침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여섯 명을 만들었다.
“다 같이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3”
6명이 재빨리 둘로 나뉘었다. 셋이 되었다.
“2”
운명의 짝인 듯, 둘이 얼싸안았다. 힘이 약한 건지, 우정이 그들에 못 미친 건지 한 명이 외따로 서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틈이 없었다. 어딘가에 황망한 얼굴로 홀로 있을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그에게 나는 희망의 빛일 것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 아이를 발견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나보다 발 빠른 누군가가 먼저 달려가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살았다’는 안도의 숨결이 그들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들은 둘이 되었다.
노래가 다시 시작되기 전, 혹시 남아있을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아무도 없다. 넓은 운동장에 홀수는 나 혼자이다. 짝수가 될 기회를 영영 놓쳤다.
꽃은 홀수로 꽂아야 한단다. 3송이, 5송이, 7송이로 꾸며진 화병이나 꽃다발에 사람들은 익숙하다. 왜 꼭 홀수여야 할까. 짝 없는 하나의 외로움은 어쩌라고. 사람들은 4나 8 같은 짝수를 좋아하지 않는 동양인의 정서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양화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 한과 슬픔이 홀수에게서 더 각별하다. 짝을 이루지 못한 하나가 뿜는 적요 때문일까. 완벽하게 합을 이룬 짝수가 주는 안정감보다 정처 없이 떠도는 하나가 풍기는 고독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비대칭 모나리자의 얼굴이 아름다운 것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화를 부려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린다. 홀수가 못할 일은 없다.
친구와 둘이 카페에 가면 커피 두 잔과 조각 케이크 하나를 고른다. 두 개의 조각 케이크는 어딘가 덜 미학적이다. 각자의 커피 잔 사이를 한 개의 조각 케이크가 잇는다. 둘은 하나가 되어 케이크를 무너뜨린다.
두 아들이 있다. 제법 이른 나이에 각자의 방을 썼다. 아이들이 먼저 자기 방을 갖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 불편을 호소할 때까지, 짝수가 되어 하나의 방에서 함께 자고 부대꼈다면 어땠을까, 서로에 대한 정이 조금 더 깊어졌을까. 한 개의 접시에 두 머리를 맞대고 경쟁적으로 떡볶이를 먹은 아이들은 개인 접시에 나누어 자산의 몫만 먹은 아이보다 더 포용적일까, 1이라는 홀수는 공유이며 나눔이라 더 희생적이고 사회적인 걸까.
딱 맞아서 남는 것이 없는 짝수가 아니라 끝나지 않은 채, 여운을 남기는 홀수가 외로우면서도 아름답고, 희생적이며 사회적이라면, 그건 참 괜찮다.
한 개의 침대에서 짝수가 잠이 든다. 꿈을 꾼다. 누군가는 광화문 한복판, 긴 칼 옆에 차고 있는 이순신을 만난다. 누군가는 태양에 그을린 모래 물결이 출렁이는 사하라 사막을 걷는다. 짝수지만 홀수이고 홀수지만 짝수이다.
초등학교 수학 시간, 낯선 짝수와 홀수가 수십 년이 흐른 오늘도 이해의 문턱을 넘나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