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증후군이야

곧 죽어도 뜨아

by 미진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메뉴판도, 한쪽 벽에 빼곡히 적힌 음식 이름도, 고객 추천 best 또는 주인장 강력 추천 별 스티커도 소용없다. 일주일에 두세 번 들르지만 내겐 한결같이 처음이다.


거룩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다. 성질 급한 사람은 유리문을 열자마자, 적어도 의자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밥심으로 산다는 강 부장은 잡채밥을, 나머지 일행들은 높은 적중율로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다. 이 음식들은 대게 49대 51이거나 51대 49로 간택되는데 어느 날은 짜장면, 어느 날은 짬뽕을 먹었다. 다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누구도, 며느리도 몰랐다. 피크 타임에 식당 직원들의 눈빛은 사뭇 결연하다. 설렁한 망설임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다. 최종선택 3초 전까지 미결 상태인 나는 초조하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하나둘 음식을 주문시작했다.


짬뽕이요.


짜장이요.


쾌변처럼 시원하다. 저들은 처음부터 짬뽕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백만 년 전부터 짜장면을 먹기로 작정한 사람인 것처럼 입에서 술술 내뱉었다. 저들에게 있는 타고난 기호가 내게는 없었다. 닥칠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을 미리 마련했어야 했다. 시작부터 다른 출발, 매번 무의 상태가 되어 선택이라는 높디높은 벽에 부딪혔다. 나는 더, 더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잠을 줄이고 멍 때리지 말고 고민했어야 했다.


무대 위 핀 조명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나를 향해 빛 하나가 촘촘하게 다가왔다. 주문 준비를 마친 직원의 성실한 눈이 마주쳤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요,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하찮은 문제니까. 이깟 일에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세상 부끄러우니까. 왼발이 먼저 나오는지 오른발이 먼저 나오는지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것처럼 이 또한 만 가지 일 중 만 번째도 못 되는 그런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은 척, 생각했다는 생각도 잊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김 주임이 겉옷을 벗으며 귀찮은 듯 성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짜장이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짜장 다음에는 뭐가 나올까. 앞사람의 선택은 다음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통계적으로 말이다. 심리적 동일성, 아니면 차별성일까. 그렇다면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춘다.


짬뽕이요.


그래, 차별성이다. 어차피 둘 중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다. 김 주임의 선택을 기준으로 그와 다른 결정을 하겠다는 순간적 판단이 작용했다. 앞사람과 다른 메뉴를 선택하는 방식은 다양성 면에서도 자연스럽다. 혹시 그런 태도가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어떡하지. 아, 모르겠다.


나는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고민하지 않는 햄릿이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자르고, 하얀 김이 오르는 붉은 짬뽕에 얼굴을 묻었다.


복성각을 나와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신입사원 J가 스타벅스 앞에서 멈췄다. 커피를 쏜단다.


아아.

아아.

아바라.

아아.


J가 나를 바라본다.


뜨아지.


한여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향해 일초의 망설임 없는 나의 쿨한 선택이었다.


휴~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