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살 안내자이다.
작가의 상을 좀 더 진해지고 굵게 스케치해야 했다. 살인의 추억이나 여행의 이유가 각각 만년필과 연필로 쓰였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매직으로 휘갈긴 느낌이다. 작가 김영하가 궁금해서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머무르고 배회하다 보면 더 보이기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솔직하고 불편한 제목은 다음같은 매력적인 목차로 상쇄된다.
다비드의 <미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1>, 들라크루아의 <사그다나팔의 죽음> 3가지 그림을 모티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두 죽음으로 엮여 있다.
주인공은 외로운 사람, 괴로운 사람 그리고 자살이 필요한 사람에게 접근해서 그들에게 자살을 권하는 <자살 안내자>이다. 이런 이야기가 글로 쓰일 수 있다니 신선하기도 놀랍기도 하다.
고흐의 풍경화와 자화상 중에서 어느 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자화상을 탐닉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다. 자신의 내면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내밀한 쾌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그 역시 고독한 인간이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p11>
그는 그렇게 고독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숨겨진 욕망을 건드리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받은 돈으로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쓴다. 극중 고객 중의 한 명인 유디트(세연)이 고통스러운 삶을 마무리하며 자살을 결정할 때 어느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그간 고통 속에 츄파춥스를 진통제로 먹던 그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에 처음으로 관심과 흥미를 가졌다. 그렇다면 <자살 안내자>인 주인공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마지막 장인 사르다나팔의 죽음에서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인 <사르다나팔의 죽음>을 묘사한다. 광란의 살인 현장은 밝게, 그리고 멸망해가는 바빌로니아에서 죽음의 향연을 벌여야 하는 비운의 왕의 모습은 어둡게 묘사됐다. 자살 안내자의 도움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차라리 기쁨이고 이를 주재하는 작가는 슬픔이며 고통이라는 뜻일까.
김영하 작가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출간한 것은 1996년이다. 그의 등단 후 초기 작품이다. 세기말 염세주의가 판을 치고 세상은 종말을 떠들고 미래에 대한 기대는 0에 수렴한다. 이 직품이 허무한 세상을 향한 한 개인의 저항이며 소산인지, 누군가가 무력한 이들을 자살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작가는 혼잣말을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