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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Jul 09. 2021

한여름 밤, 마법의 문이 열리면

과거로의 시간여행

금산 살이 1년을 추억하면,

남편은 육회비빔밥을, 나는 회 냉면과 싱싱한 딸기를 떠올린다. 논개, 촉석루, 남강, 유등축제, 김시민 장군, 중앙시장, 청과물, 육전이 올려진 냉면, 육회 비빔밥 등으로 유명한 진주에서 차로 15분만 가면 숨겨진 태고의 숲과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에 비친 월아산의 달이 아름다워 아산 토월(牙山吐月)이라는 별칭까지 생겼단다. 월든의 호수 못지않게 평화로웠다. 새의 날갯짓 소리, 바람을 입은 풀의 흔들림 그리고 저수지의 잔잔한 파동마저 크게 들리는 곳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금호 저수지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게 일상이었다.  그날은 미뤄온 집안일을 하느라 산책 시간을 놓쳤고 여름의 해는 길었다. 서둘러 금호지를 향해 길을 나셨다. 속도를 좀 더 내면 어두워지기 전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해보니 입구에 매표소와 출발 대기실이라고 적힌 공중전화 부스 모양의 가건물 두개가 있었다. ‘아니, 입장권을 사라고, 어제까지도 공짜였는데. 돈을 받네.’ 슬그머니 심통이 났지만 관리상 입장료가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매표소에서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표를 팔고 있었고 그 옆 출발 대기실에는 정면에 모니터가 달린 황금빛 의자가 놓여있었다. 요금 표 위에는 ’시간을 돌려드립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 티켓>

시간을 돌려드립니다.

직행: 10.000원

완행: 5.000원

총 소요 시간: 1시간

          과거로 시간 여행 주식회사 [직인]


급행은 의자에 앉아 버튼을 누르는 즉시 원하는 시간으로 이동해서 1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다. 완행은 시간을 거슬러 가다 멈추기를 원하는 지점에서 버튼을 누를 수 있다. 단 결정이 늦어지면 남겨진 시간만큼만 머무를 수 있다. 각자의 선택이다. 총 소요 시간은 한 시간이다. 과거로 시간 여행 주식회사 옆에는 빨간색 직인이 찍혀있다.             

pixabay


‘한 시간이면 돌아오는데 뭐. 1989년 대학교 2학년 때로 돌아가자. 망설이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스크린에 start 화살표를 터치했다. 그리고 back을. 화면 위 손가락 지문이 점점 줌인되며 나는 지문의 융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몸이 움찔하며 캡슐처럼 생긴 박스가 흔들렸지만 이내 멈췄다.


대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연아와 나는 학교 앞 호프집에서 낮술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들마다 경쟁적으로 내주시는 많은 과제들과 팀플의 비합리성을 성토하며 개인 점수만 챙기고 편하게 팀 점수를 업어가는 무임승차하는 아이들(free rider)을 오징어 안주 삼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그때 연아가 신상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너 온누리 여행사 알지. 이거 정말 따끈따끈한 정보인데. 여름방학 유럽여행 포스터를 학교 게시판에 붙이면 여행 경비를 반으로 해준대. 직원 개념인 거지. 어때 해볼래. 난 하려고. “


스치는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귀를 가진 나의 심장은 심하게 흔들렸다. “음 일단 집에 말해보고.” 방학 동안 사촌 동생 과외를 해주기로 했는데 어쩌지. 반값 DC 면 매력적인 조건이긴 한데. 하루에도 열두 번 망설였다. 젊은 여학생이 보호자도 없이 해외여행하는 걸 허락하실 부모님이 아니셨다. 


“그럴 줄 알았다. 하루 외박도 못하는 네가 어떻게 유럽여행을 가겠니.” “미안해. 내가 포스터 붙이는 거라도 도와줄게.” 나는 연아를 도와 지구가 찡긋하고 윙크하는 유럽여행 포스터를 교내 모든 게시판에 붙였다. 며칠 후 연아는 유럽으로 떠났고 나는 낮에는 관공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과외를 했다. 통장에 돈이 쌓여도 즐겁지 않았다.


20일 후 돌아온 연아는 내게 무너진 독일 베를린 장벽 한 조각과 프라하에서 산 화려한 색감의 티코스터를 선물로 주었다. 동독인들의 목숨을 건 혁명으로 그렇게 견고했던 베를린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그들이 하나 되는 모습을 나는 뉴스에서 보았다. 하지만 연아가 티슈에 고이 싸온 돌덩이와 체코의 천 조각은 생경하고 낯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28년 후, 


<거꾸로 시간 여행 급행 편>이 도착했다.

“연아야, 내일 공항에서 만나.”

"O.K"

새벽 어스름을 틈타 트렁크 두 개를 끌고 집을 나왔다. 옆집 개는 눈치 없이 지져대고 있다. 그동안 죽어라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정승처럼 쓰기로 했다. 개고생도 노숙도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꺼이 모든 것을 경험하리라. 배낭에는 수없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동유럽 여행 가이드북이 있었다.

pixabay -슈테판 성당

연아와 나는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잠은 유스호스텔을 이용했다. 역사의 현장인 베를린을 지나 ‘프라하의 봄’의 흔적을 마주하고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을 방문하고 굴뚝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비엔나에서는 모차르트 초콜릿 가격에 놀라고 슈테판 대성당에서 우리의 불투명한 청춘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벨베데레 궁전에서 그리워하던 클림트를 만났다. 한국을 모르는 세계 젊은이들에게 동남아의 작은 나라 하지만 재미있는 나라, 한국을 침을 튀기며 알렸다.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지도를 들고 돌아다녔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겨우 샤워만 마치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3초' 2초' 1초'


“쿵” 하고 출발할 때 모습 그대로 나는 돌아왔다. “한 시간이 이렇게 길어요? 15일간 유럽여행을 했는데.”  매표소의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에게 물었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와는 다르게 흘러간답니다. 시계를 보세요. 정확히 한 시간이 흘렀어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21살 우리의 여행은 혹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가 후들거려 그림자가  자꾸 옆으로 새어나갔다. 어느새 진주에 밤이 찾아왔다.  방금  떠난 프라하의 검푸른 하늘과 찬란한 밤의 야경은 내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 채웠으리라. 여름밤 과거로 시간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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