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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Sep 02. 2021

싸우지 말고 싸매

당신은 인싸인가


"아닌 건 아닌 거지, 진작에 손절하는 게 현명한 거야."


얼마 전 가까운 이에게 들은 말이다.


참 기발한 신조어가 많다. 그 말이 생기기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싶게 새롭게 생겨난 신조어들은 필요한 순간마다 찰떡처럼 요긴하게 쓰인다. 그런데  손절이라는 말은 어색했고 생활 속에서 편히 사용하기엔 좀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여기서의 손절은 경제 용어에서 일상어로 의미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의 관계도 주식처럼 더  나빠지기 전에 미리 손해를 감소하더라도 과감히 그 관계를 끊는 행위를 '손절한다'라고 표현하나 보다. 주식이 전 국민에게 일반화되다 보니 이런 쓰임도 생긴 듯싶다.


손절:
명사 경제 앞으로 주가(株價)가 더욱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여, 가지고 있는 주식을 매입 가격 이하로 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일. <네이버 국어사전>
일부에서 우려했던 증권사 등 일부 기관들의 손절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출처 <<연합인포맥스 2008년 7월>>
손절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손절을 안 해도 되는 거래이다.  출처 <<포커스신문 2012년 4월>> 


사람 사이에 관계에 손절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좀 생소하다. 혹여 관계가 진행되기 전, 말하자면 인간적인 유대나 신뢰가 생기기 전 손절한다고 하면 자연스러울까. 그것 또한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서로 맞지 않는 다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 친해지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관계가 돈독해진 이후라면 더욱이 그동안 맺은 인연과 함께 한 세월을 무 자르듯 정리하는 건 무 자르듯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개선의 여지는 전혀 없었던 걸까. 혹여 한 사람의 오해 또는 양쪽의 오해는 아니었을까. 미련을 가져본다. 만남과 헤어짐이 쉬운 이 시대가 아쉽고 쓸쓸하다.


© anthonytran, 출처 Unsplash


풍요로운 관계는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닐까.


나는 관계가 서툰 사람이다.

지독히 게으르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지 못한다.

뭉그적거린다.

조심성이 많다.


누군가의 정성 어린 글을 보면 몇 번 읽고 나서야 댓글을 달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는 편이다. 댓글을 쓰다 지우기가 일쑤다. 충분히 공감한 후 댓글, 답글을 써야 마음이 편하다. 미루어 짐작하고 마음대로 판단해서 본 뜻을 오해할 까 염려스럽다. 그런 탓인지 매사에 느리고 자주 놓친다. 길게 깊이 있는 댓글을 쓰시는 분들, 바로바로 응대하는 부지런한 분들을 보면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인싸인가? 그렇다고?

진정 부럽군, 쩝.


인싸 (insider)
‘인사이더’라는 뜻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 ‘인사이더’를 세게 발음하면서 다소 변형한 형태로 표기한 것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두말할 것 없이 나는 앗싸에 가깝다.

아웃사이더라는 얘기다.

사실 앗싸를 즐기는 편이기도 하다. 두 아이의 엄마로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고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 외로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도 불현듯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이 된 느낌을 진하게 받지 않을 수 없다.


각종 모임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부족해 집단 사이에서 존재감이 약하다. 특별히 이 경우는 온라인 모임, 단톡 모임 등에 해당한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오락부장을 담당할 기세고 침묵과 어색함을 깨는  아이스 브레이커에 가까운데 유독 온라인에서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수동적이다. 유령회원 중 한 명이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공지사항을 준수하고 과제를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그들의 대화에 한결같이 지켜보고 웃고 울고 하고 있는데 그걸 멤버들이 알 턱이 없다. 100% 내 잘못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왜 내 말을 안 듣느냐고  타박하는 격이고 나한테만 관심을 갖지 않냐고 칭얼대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꼭꼭 숨어서 왜 나를 찾지 않느냐고 하다가 잔뜩 삐져있다가는 서운함에 겨워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맞아. 000가 있었지. 우리가 깜빡 잊고 있었네. 근데 우리가 뭘 잘못했더라. 특별히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가 너무 무심했나. 나는 안다. 아무도,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음을.


© Couleur, 출처 Pixabay


나이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철은 제철소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늦게나마 내게 왔다. 그냥 모든 감정이 싸매 진다. 이런 감정, 저런 감정들이 서툰 실로 봉합된다. 시간이 많은 부분을  덮어주었다. 한참을 지나다 보니 서운했던 사람과 자연스럽게 관계가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일들로 이전 일들이 묻힌다. '싸매다'라는 단어는 일단 넓은 부피감, 면의 촉감이 느껴져서 좋다. 켜켜이 쌓인 감정을 헤집다 보면 잊힌 감정, 묵혀진 감정이 불쑥 살아서 튀어나온다. 부활을 경험한다. 헤집어서는 안 된다. 일단 싸매고 시간을 가져보자.


아픈 상처를 거즈로 싸듯 사람들의 덧난 마음을 곱게 싸매는 일은 엄마의 품처럼 인자하다. 시간은 상처를 여물게 한다. 시간과 함께 아무 일이 아닌 게 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한다. 주위를 돌아보자. 외로운 사람의 허허로운 마음을 폭신한 털실로 감싸주고, 가시가 돋친 듯 뾰족한 마음을 따뜻한 오리털로 덧대주자. 


사람의 마음은 부끄러울만치 단순해서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눈길이 머무는 순간, 한여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처럼 녹는다. 철옹성으로 둘러싸인 듯 경직되고 소외됐던 마음은 간데없다.


싸매다:
무엇을 싸서 풀어지지 아니하게 꼭 매다.
붕대를 머리에 싸매다.
나무에 짚을 싸매다.
수도꼭지가 얼지 않게 헝겊으로 꼭 싸맸다.
뜰 가운 덴 짚으로 싸맨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어 황량한 겨울의 뜰다운 정경을 펼치고 있었다.
출처 <<이병주, 지리산>>
네이버 국어사전


"싸우지 말고 싸매"라는 몇 주 전 온라인 목사님 설교 내용 중 한 구절이다. 떠올리기 싫어도 자동 플레이되는 노랫말처럼 내 머릿속에 리플레이되는 문장이다. "싸우지 말고 싸매." 그래, 산이 흙과 돌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기분 좋은 감정도 속상한 감정도 다 하나지. 그 모든 감정들을 지나며 견고해지고 높아지는 거겠지. 이것, 저것 가리면 언제 산이 되겠어. 햇볕에 보송보송 말린 면으로 덧나고 아픈 상처를 싸매야지. 벌어진 관계를 꼭꼭 감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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