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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Aug 20. 2021

마트에 불이 꺼지면 생기는 일

酒中四友爭論記(주중사우쟁론기)


10시 매장 문이 닫힐 시간이다. 

마감 준비로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떨이다. 

팔다 남은 떡 3팩을 박스 테이프로 둘둘 묶어 만 원에 판다. 마감 시간임을 알리는 멘트와 클로징 노래가 흘러나오면 직원들은 찌든 작업복을 벗고 가뿐한 사복으로 갈아입는다. 퇴근이다. 늘 그렇듯 피곤한 하루다.


순차적으로 소등이 시작된다.

커다란 매장 안에 무거운 적막이 찾아온다.

‘툭’하는 마지막 소등 소리와 동시에 수십 개의 냉동고와 냉장고가 거친 심장 소리를 내며 박동한다. 밤은 밤처럼 까맣지 않다. 거리의 가로등이 없어도 충분히 주위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밝기다. 냉장고의 거대한 문짝 틈으로 주황색 백열등 빛이 새어 나온다.


© matt__feeney, 출처 Unsplash


른 소리와 박자로 작동하던 기계들이 어느새 일정한 규칙을 만든다. 축산 코너 냉동고가 만드는 저음의 소리가 바닥에 깔리면 생선코너의 냉동고는 긁는 듯한 고음 소리를 내며 공중을 떠돈다. 냉동 완제품과 냉장 유제품 코너는 간헐적으로 수축과 팽창의 기계음을 방출한다. 이들의 돌림노래는 밤새 계속된다.


식품부에서 멀리 떨어져 조용한 이곳,

대형마트 주류코너다.

작정하고 특정한 술을 사려고 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이 앞을 지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만 원에 4개나 특별 할인행사로 6개 맥주가 묶인 다발을 집어 들거나 주류코너 입구에 있는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두 개를 꺼내 간다. 와인 특별 판매 기간에는 목 좋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1개에 19.800원, 25.000원짜리 와인을 선보인다. 수량한정이지만 제법 괜찮은 와인 오프너와 스토퍼 세트를 사은품으로 주는 판촉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90% 이상의 매출을 발생시키는 행사 매장이 그런대로 본사와 마트의 효자 노릇을 한다. 이런 이유로 본 매장까지 들어와 술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 chuttersnap, 출처 Unsplash


자주색 벨벳에 둘러싸여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마트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수입 주류 총괄팀장이 들여놓은 값비싼 와인이다.


'난 이곳과 맞지 않아. 알아봐 주는 사람 하나 없고 어쩌다 눈길을 줘도 냉랭하기만 해.’ 서운함을 속으로 삭이며 한마디 던진다.

모두들 나를 부담 없이 즐겼으면 좋겠어. 난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고. 비싼 건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나름 제값을 한다고. 풍요로운 토양, 뜨거운 햇살을 받아 포도농사가 절정인 연도에 만들어진 와인 가격은 상상하기도 힘들걸. 세월이 지날수록 그 가치는 더해지지. 하지만 마셔봐. 물론 비싼 게 다 좋다는 건 아니야. 네 형편에 맞는 가장 좋은 와인을 찾으면 돼. 미리 포기하지 말라고.

유럽에서는 와인은 비즈니스를 성사시킬 가능성을 높인다고 해. 사업 규모와 와인 가격은 비례한다지, 축하의 순간 기쁨을 배로 하고, 사랑의 순간 그 사랑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지. 너희들 하늘이 내린 축복을 놓치지 말라고.

© kelsoknight, 출처 Unsplash


뭐가 이렇게 거창해, 옆에 미지근한 몸으로 서있던 맥주가 나선다. 술이라는 게 기분 좋으면 되는 거 아니야. 또 그렇게 비싼 걸 어떻게 마음 놓고 편히 사 먹겠니.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바에 사람들이 얼마나 갈까. 술이란 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야지. 넌 술의 정의부터 다시 공부해야겠구나. 소수를 위한 건 전유물에 지나지 않아. 하루 일을 마시고 tv를 볼 때, 반가운 친구를 만났을 때 맥주 한 잔 마시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니냐고. 맥주는 쌀, 김치 같은 거라고. 필수품, 생필품 말이야.


축구 응원전이 열릴 때 치킨하고 맥주 마시는 거, 생각만 해도 신나지. 치맥은 조만간 국어사전에도 등재될걸. 어제도 아이들이 잠들자마자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지? 하루에 마침표가 꽝하고 찍히고, 고된 육아 우울을 달래준 게 누구냐고.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곡물의 왕이 누군지는 알겠지. 바로 보리야. 보리는 심장질환, 당뇨, 변비와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고. 맥주 먹고 살 쪘다고? 그건 안주를 너무 많이 먹은 네 탓이야. 제발 죄 없는 맥주를 걸고 넘어가지 마.

© kazuend, 출처 Unsplash


경망스럽긴 이걸 말로 해야 하니, 냉장실에 놓여있던 막걸리가 참다못해 한마디를 한다. 뙤약볕에 땀 흘리고 농사지을 때 흙먼지 뒤집어쓰고 공사현장을 누빌 때 목구멍 뚫어주는 게 누구야. 배고픔도 면하게 해주는 근본 있는 녀석이 누구냐고. 천 번 만 번 막걸리가 맞지. 내가 싸다고 얕보나 본데. 싸서 모자란 거 있어. 난 누구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척 허세 부릴 필요가 없다고. 어디에 가서도 잘 어울리는 한마디로 조직의 핵인사라니까.


두부에 새콤하게 찐한 묵은지를 척 얹어 먹을 때, 탱탱 차오르는 도토리묵 한 접시가 상위에 오를 때, 내 생각 안 했어? 단내 나는 고추장에 똥 뺀 멸치를 찍어 먹어도 구수한 된장에 풋고추를 푹 찍어 먹을 때도 내 생각 했지? 사람 가리지 않고 두루뭉술 잘 어울리는 내가 시대의 아이콘이지. 요즘 애들이 몰라서 못 먹지 한번 맛 들이면 곧 나를 팔로우하려고 난리일걸. 조용히 자연에서 청풍명월을 즐기고 싶어서 나서지 않을 뿐이라고. 다들 좀 알고 떠들어라.

© macintoy, 출처 Pixabay


거참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네. 너희들 아직도 불만이 많구나. 유사 이래 지존인 소주를 인정하기가 그렇게 억울한 거야? 그럴 수 있지. 그럼. 그럴 수 있지. 술맛을 제대로 알려면 뭐랄까. 인생을 알아야 하는데 너희가 좀 미성숙한 데가 있지. 극단의 고독과 외로움, 몸서리침을 안다면..... 작은 술잔 속에 따라지는 소주가 내 심장의 눈물로 보일 때, 그 사람의 눈물로 보일 때, 그 영롱함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눈길을 피할 때 그 눈물을 내가 마셔야 할 때, 그 눈물이 내 눈물이 되어 다시 흐를 때 그때 즈음이면 너희들이 나를 온전히 인정할까.


요즘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소주를 마신다지? 세상에 첫 발을 딛는 젊은이들에게 매섭기만 한 비성장 시대의 쓴맛을 미리 맛 뵈어 주는 거 아닐까. 현재와 직면하는 술, 과거를 아프게 떨치는 술, 그 기운에 미래를 붙잡을 용기를 주는 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영혼의 반쪽 같은 작고 소박한 녀석을. 너희들끼리 싸우던 말 던 난 계속 자련다.

© shootdelicious, 출처 Unsplash


기가 막혀서 들어줄 수가 없네.

뭐라고?

여전히 건방지군.

4명의 술들이 자신이 최고의 술이라며 핏대를 세운다.


그때 캡스 직원이 매장 입구를 서성인다.

‘분명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에이 모르겠다. 빨리 퇴근하고 한잔해야 지.‘


너희들 김 군이 무슨 술 마시는 줄 알아?

“100% 나지” 맥주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오늘 김 군 여자 친구 만난 지 300일 되는 거 몰라? 분명 와인이겠지.”

“거참, 오늘 박 과장한테 욕을 사발로 먹고 열받았거든, 소주가 땡길걸.”

“내가 알기론 김 군이 전통 막걸리 동호회 회원이라지.“


"저, 저기, 주류 쪽 조용히 좀 합시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제법 깊은 잠을 자던 즉석식품과 통조림 형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다시 찾아온 침묵,


멀리서 냉장고와 냉동고의 소음이 흐리게 들려온다.


웅웅웅,

키키키,

푸쉬푸쉬



참고: 이 글조선 후기 고전 규중칠우쟁론기를 모티브로 하여 쓰여졌습니다.

규중칠우쟁론기
[ 閨中七友爭論記 ]
요약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작자 ·연대 미상의 한글 수필.  요약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작자 ·연대 미상의 한글 수필.  
몇 가지 문헌에 전하고 있으나, 《망로각수기(忘老却愁記)》에 수록된 것이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다. 규중 부인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침선의 7가지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그 칠우(七友)는 세요각시(細腰閣氏:바늘)·척부인(尺夫人:자)·교두각시(交頭閣氏:가위)·울낭자(熨娘子:다리미)·청홍흑백각시(靑紅黑白閣氏:실)·인화낭자(引火娘子:인두)·감투할미(골무)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규중칠우쟁론기 [閨中七友爭論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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