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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26. 2019

우울증 환자의 연애

그리고 올해 상반기 이야기...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좀 힘들고 이상하고 행복한(?) 몇 개월을 보냈어요.

제목은 연애에 관한 것인데 이야기의 시작은 힘들었던 이야기부터 하게 되네요.ㅎㅎ


힘들었던 이야기: 아빠의 우울증


올해 초에 저희 아빠가 우울증에 걸리셨고 심각한 정도로 삶의 희망을 잃고 죽음까지 생각하는 상태가 되셨어요. 우울증의 원인은 역시나 저...


우울증 환자인 가족과 함께 살면서, 사랑하는 가족이 고통받으며 반쯤 죽은 채로 살아가는 걸 곁에서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죠. 그걸 오래 해오시다보니 저희 아빠에게도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네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병원도 거부하고 오직 의지력에 기대서 병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계시죠.


지난 몇달간 부모의 사랑이 정말 위대하다는 걸 경험했어요. 저는 우울증을 바닥까지 겪어봐서 아빠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계신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빠가 질식할 것 같다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다고 말할 때 차마 살아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응하는게 정말 맞는건지 수십번 고민하면서 제가 한 말은 '내가 아빠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차마 살아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이 고통이 너무 끔찍하니까 아빠가 죽음을 선택하는게 더 편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 내가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지만 아빠한테 이런 큰 고통을 줘서 정말 미안해, 나는 아빠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일 수 있고 잘 살 수 있으니까 오직 아빠 자신만 생각하고 결정내려도 돼, 그런데 어차피 죽는다면 병원 진료는 마지막으로 한번 받아보는게 어떨까... 그런 생각은 해'였어요.


아빠는 그런 말을 듣고 다시 기운을 내셔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셨어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우울증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압도한거죠. 그러고 나서 다시 심한 우울증이 나타나고 죽고 싶다는 말을 하시는 때가 오고. 올해 1월부터 5월 초까지 다섯 달 동안 그런 상황이 반복됐어요. 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도 같이 오다보니 더 힘든 상황이었죠.



작년에 우울증에서 많이 회복되었다고 느꼈는데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보니 저한테도 조금씩 타격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전같으면 아빠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죄책감에 짓눌려 자살을 생각하고 아마 시도도 했을텐데... 하지만 올해 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꾸준히 들었어요. 그리고 그런 상태의 아빠에 대해 어떻게든 대처해볼 생각을 할 만큼의 정신적인 에너지도 있었어요. 많이 발전했죠:)


하지만 그래도 많이 힘들었죠. 지금도 힘들어요. 요즘에는 아빠가 최대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좋은 표정을 하고 계시지만 언제 무너질지 몰라서 두렵고 불안해요. 그래서 밤에 잘 때도, 아침에 눈 뜰 때도 방 밖에서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오늘 아빠의 기분이 어떤지 항상 주의를 기울이게 돼요. 그렇게 신경쓰느라 잠을 푹 자지도 못하고요.    


너무 힘들어서 다시 무너질까봐 두려웠지만... 제가 작년에 브런치에 썼던 것들을 되새기면서 많이 걷기도 하고 온 몸과 정신을 다 쏟게 만드는 도자기 만들기도 하면서 열심히 버텼어요. (도예 수업은 정말 강추합니다... 제가 경험해본 취미생활 중 가장 몰입도가 높은 활동이네요. 꼬박 5~6시간을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계속 앉아있을 수 있었던...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역설적이지만 도자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 스트레스가 너무 크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스트레스들을 잠시 잊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5~6시간 동안 도자기를 만들다보면 허리도 아프고 몸이 힘들어서 잡생각에 괴로워할 여유가 없어졌죠...)


그래서 최근 몇달간 저의 일상은 죽어서 편안해지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힘든 날도 있지만 어느정도 편안하고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날도 적당히 섞여있는... 그럭저럭, 열심히, 잘 버티고 있는 상태예요. 부처님도 인생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을 느끼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왕궁도, 가족도 다 버리고 극한의 고행을 하기도 하셨잖아요. 원래 인간으로 산다는게 어느정도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정 상태와 사건들은 우울증으로 인한 병적인 고통이라기보다는 그냥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좀 바뀌었죠:) 전보다는 마음의 에너지가 좀더 생겨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귀여우니까 나를 키워라냥...!!!)


이상하고 행복한 이야기: 연애를 시작하게 됐어요


우울증 환자라서 연애하기 힘든 조건인 제게 냥줍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심한 우울증을 경험했고 현재도 어느정도는 경험중이며, 백수이고, 외양을 꾸미지도 못하는(?) 저를 현재 모습 그대로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됐어요. 현재 제 모습은 뭔가 병원비가 잔뜩 들어갈 수도 있고 귀엽지도 않은 길 고양이인데 그런 걸 다 감수하고 주워가고 싶다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상황이라 연애라기보다는 냥줍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인생에서 이런 사람을 만날 확률은 고양이를 키워본 적 없는 사람과 길고양이가 인연이 닿아 함께 살게될 정도의 확률 아닐까요.

    


저를 왜 좋아하게 됐는지는 정말 의문이지만... 계속 물어보면 콩깍지 벗겨져서 떠날까봐 이 질문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습니다.ㅎㅎ


남친에게 감사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사실 이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두달 정도, 그리고 사귀기로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과분하고 고맙다고 해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공짜라도 양잿물은...(???)


남친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연애를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는 상태라는게 문제였어요. 아빠의 우울증과 여러가지 저를 둘러싼 문제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사람을 자주 만나고 매일 여러번 카톡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어요. 지금은 사정상 화장도 하기 어렵고 예쁜 옷이 있어도 입을 수 없고 좀 과체중인데 다이어트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는(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쓸 에너지도 부족해서 배고픔을 견디는 데까지는 돌아갈 에너지가 없는...) 상황이라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아진 것도 스트레스였고요. (심지어 나이도 제가 더 많아요ㅎㅎ) 사회적인 부분에 관한 자존감이 바닥인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우울증에 깊게 빠질 때도 마냥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느정도 평온하고 즐거운 카톡 대화를 나눠야 하고 만나서는 웃는 표정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우울하고 힘든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도 우울하고 힘들어져서 결국 제 살 깎아먹기가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저는 그런 모습을 잘 안 보이려고 해요. 저는 마음속으로 고통받더라도 상대방은 영향받지 않고 행복해서 그런 행복한 에너지로 저를 꾸준히 지탱해줬으면 하는게 제 바람이거든요. 지금 남친이 친구인 동안에는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어서 힘든 모습을 숨기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연인이 된 때부터는 그 거리가 확 줄어들다보니 매일 평온한 감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연애가 부담스럽고 힘들게 느껴졌어요. 그런 느낌이 드니까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게 맞나?'하는 의문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죠.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는데 단지 외로워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사람을 잡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그렇다면 이건 상대방에 대해서도 큰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이기도 하죠. 아무튼 저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도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걸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만날수록 점점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만났을 때 굉장히 편안하고 행복하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은 느낌이 점점 더 강해졌거든요. 뭔가 이야기하는 것마다 서로 잘 통하고, 남친에 대해서 아는게 많지 않은데도 다 아는 것처럼 생각되고, 그렇게 다 안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편안함이 있었어요.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느껴지는 행복감은 친구같으면서도 친구를 넘어선 감정이었어요. 1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나면 대화가 잘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이였는데... 그 긴 시간 동안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 행복감이었어요. 그러다 어느순간 알게 됐죠. 사랑하는건 확실한데 지금 제 정신건강이 연애를 감당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상태라는 걸요.          


그걸 확실히 알게 되면서부터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이제는 약간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게 저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그만큼 상태가 안좋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서 연애에 관한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않아요. 대신 저를 좀더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죠.ㅎㅎ  

 


혹시 저같은 상황에서 연애를 하시는 분들에게 참고할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써봤어요.ㅎㅎ 연애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충분한 확신을 주는 상대와의 연애는 우울증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상처받을까봐 자살은 하지 않고 부모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살겠다는 마음이 과거지향적이었다면 남친과 함께하는 삶은 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들어요. 남친과 미래를 생각하기 이전에는 제 미래가 예측가능했다면 (부모님과 지금과 비슷한 패턴으로 같이 살면서 우울증도 왔다갔다 하고 취미생활도 하는 그런 삶) 남친과 함께 할 미래는 전혀 예상이 안되네요. 예측불가라 뭔가 삶에 대해 기대하는게 생긴 느낌이에요.


그리고 그런 기대감이 안정감도 주는 것 같아요.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없을만큼 공허해서 더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것들,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많이 불안하고 흔들렸다면, 기대하는 것이 생긴 이후에는 뭔가 그 미래를 함께할 사람을 통해서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린 느낌이 들어요.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네요. 아무튼 인생을 바라볼 때 느껴졌던 공허감, 흔들림이 꽤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에요. 우울증의 정도에 관계없이요. (물론 이건 그만큼 저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예전 연애에서는 극도의 불안감과 감정기복이 있었다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자존감도 많이 올려주고요. 저는 이해 안 되지만(;;;) 남친은 쌩얼에 우울증으로 표정도 좀 어둡고 과체중에 옷차림도 별로인 저를 예쁘다고 해주고, 제가 우울증을 깊고 오래 앓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지탱해줄 에너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도망쳐...), 제가 백수에 전망없다는 거 알면서도 제가 뭘 잘해서 좋아하는게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고 좋아하는 거 아무거나 하라고 말해주고(기대도 안한 전업주부...), 해야 될 공부를 손 놓고 취미생활하러 돌아다니는 걸 전혀 한심하게 보지 않고 관심 가져주고... 이쯤되면 방송국 몰카 아닐까 싶을 정도죠. 저도 좋아하지 않는 저의 모습을 이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정말 효과좋은 자존감 주사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물론 남친 입장에서는 제가 남친에게 해주고 채워주는 것들이 있겠죠. 제가 남친한테 받는 것만큼 많지는 않더라도요. 저도 남친이 저를 좋아할만한 부분이 몇 가지는 있다고 생각해요:) 제 안에 있지만 모르고 있었던 그런 좋은 부분들을 남친을 통해서 발견할 때... 그럴 때도 자존감이 많이 올라가는 것 같아요.  


저한테 그렇게 부인할 수 없는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 거의 확고한 비혼주의자였는데도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하게 되네요. 그래서 친구 10년, 연애 1달만에 내년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쓴건 혹시 우울증때문에 좋은 인연이 나타나도 '연락이나 만남이 부담스러운 걸 보니 사랑이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해버리거나 '나같은 걸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어' , '내 우울증때문에 연애가 잘 될리 없어', '우울증때문에 연애할 에너지가 없으니까 연애는 포기할래'와 같은 생각으로 놓치시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서... 참고용으로 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썼어요.


제가 작년에 서밤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쓰리빌보드'라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는 것도 기억나네요)그중 나를 이해해주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배우자에 관한 부분은 저에게 평생 해당사항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우울증때문에 저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데 연애나 결혼생활까지 해나갈 만큼의 에너지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지금의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이 나타날 확률은 번개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했고, 오랜 우울증으로 제 안에 다른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렸다고 느껴서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 자신이 확고한 비혼주의라고 믿었죠. 그런데 1년만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밤님 책을 읽으면 1년 안에 인연이 찾아오는...?)


저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같은 분들에게 너무 가능성을 닫아두지는 마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지금 상황이 힘들다는 이유로 좋은 인연을 포기하는 건 어쩌면 수렁에서 빠져나오도록 잡아주려는 손을 뿌리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그럴 뻔 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았죠? 다음번에는 좀더 도움되는 이야기 들고 올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들 편안한 하루 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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