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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Nov 15. 2019

맞았으니까 아프지

우울증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울증에서 한참 허우적거렸던 지난 십수년간, 그리고 우울증에서 나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여러가지 방법들을 찾아 헤매던 작년에도... 저는 제 안의 상처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심한 우울증으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외부적으로는 제가 거의 상처받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불화하셨지만 그 정도 싸우지 않는 집이 어디 있겠냐 싶었고, 저에 대한 아빠의 기대치가 너무 크고 성인이 된 저를 어린아이처럼 통제하려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익숙해져서 불편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부모들처럼 자식에게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아니니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죠. 우리 집은 시집살이 같은 외부적 문제도 없고 큰 병에 걸린 가족도 없고 부모님의 외도도 없고 경제적으로 길에 나앉을 만큼 큰 사건들도 없었고 행복할 때는 정말 행복하고... 그래서 상처받을 일이 별로 없었던 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제가 수능을 여러 번 미끄러지고 그 이후로도 우울증으로 잦은 휴학에 시험 실패, 자살 시도 등등으로 부모님에게 상처를 준게 훨씬 많다고 생각했죠.


 수능도 여러 번 보긴 했지만 대학교에 온 이후로는 성적도 좋고 괜찮은 진로도 열린 것처럼 보여서 결과적으로는 별 일 아니었던 것 같고, 우울증으로 자살할 뻔했던 경험들도 결국 자살하지 않았고, 그때 자살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그 이유나 감정들도 꽤 많이 잊어버려서 지나간 일처럼 느껴지고... 제 인생의 절반 가까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우울증을 앓으면서 느꼈던 고통들도 결국은 브런치에 이렇게 '우울증을 이겨내는 방법'들을 쓰면서 다 승화시킨 것 같고, 그저 좋은 경험이었던 것처럼, 누구나 겪는 삶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지금은 우울증을 많이 이겨내서 심하게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들만 없으면 괜찮게 살고 있다고 (괜찮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제가 제 상처들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서 마음속에 꾹꾹 눌러담고 시멘트를 이중 삼중으로 발랐던 거라는 걸 최근에 깨닫게 됐어요.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는 저도 차마 볼 수 없을만큼 상처들이 많았어요.


 제가 한번 브런치에서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프로그램을 소개해드렸던 적이 있었죠. 그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다른 마음치유 프로젝트에 지난 8월부터 참여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저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을 다시 경험하게 됐어요. 작년에 처음 참여했을 때는 뭔가 상처를 들쑤시는 기분만 들고 해결책은 없는듯한 답답함,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잘 공감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이번에도 이 프로그램에 약간 회의적이었어요. 


 그런데 8월부터 매주 만나며 친해진,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는 또래들과 함께 한 이 프로그램은 저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처음에는 제가 아팠던 기억, 제가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모든 것이 제 이야기였어요. 다른 사람들이 겪은 사건들을 들으면서 그것과 비슷한 제 안의 상처들이 하나둘 끌려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경험했던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에서는 연령과 배경이 너무 다양해서 이런 경험을 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았던 경험이나 가정폭력으로 힘든 경험,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경험 같은 것들은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는 제 안의 상처들, 저도 잊어버린 아픈 기억들을 건드리고 끌어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연령대나 환경, 고민이 비슷한 집단이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과 제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군가가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했던 이야기를 듣고 제 안에서는 제가 그동안 지금은 아무 느낌도 없고 특별히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집단 따돌림이 확 솟아나왔어요.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서 굉장히 큰 분노가 일어났어요. 눈물도 많이 났죠. 그러면서 저는 그 일이 저의 십수년간의 우울증에 상당히 큰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가 느껴온 저 자신에 대한 깊은 수치심이 그때 그 일들을 겪으면서 생겨났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제가 아직까지도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고 대인관계에 회의적인 이유가 그때 그 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건 아직도 시뻘건 피를 흘리고 있는 제 상처였어요.


 저는 항상 상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건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야, 이런 걸로 몇년씩 지속되는 큰 상처를 입는다는 건 말이 안돼, 이런 걸 상처라고 한다면 니가 너무 예민하고 나약한거야. 


 그래서 제가 인생에서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 건 가족과의 사별, 이혼, 가정폭력, 폭언, 외도, 빚잔치, 암 기타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 정도의 큰 일들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저는 상처가 별로 없는 거라고, 무난한 인생을 살았던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 외에 너가 그동안 슬퍼하고 힘들었던 모든 것들이 너한테는 큰 상처였던 거라고, 그래서 그런 상처를 경험한 넌 지금 괜찮지 않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제가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추운 밤에 고속버스를 타고 엄마와 단 둘이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아직 나요. 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거예요. 아빠는 무엇때문인지 미친듯이 화가나서 집에서 전화로 고래고래 엄마한테 화를 냈고 집에 들어오지 말고 나가 죽어버리라고 악을 쓰고 있었고, 엄마는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들고 저를 데리고 울듯 말듯한 얼굴로, 집에 가면 어떤 아빠를 마주할지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엄마는 저를 위로해주고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하지 마.'라고 하면서 울상인 얼굴로 저에게 약하게 웃어주었어요. 저는 너무 힘들고 슬프고 공포스러웠어요. 그리고 엄마가 너무 불쌍했어요. 저렇게 무거운 짐도 들고 있는데... 저는 짐을 들어줄 수도 없었고 엄마한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죠. 날은 추웠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무서웠죠. 다음날 엄마의 다리에는 그 짐을 들다가 여러번 부딪쳐서 생긴 연두색 멍들이 나있었어요. 아빠와 엄마는 그 다음날쯤 어찌어찌 화해를 했겠죠. 그날 이혼하지 않고 계속 같이 살면서 그 뒤로도 수도없이 많은 싸움들을 했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이 기억이 아파요. 이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나거든요. 그동안은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기억인데 지금은 다시 슬프고 두렵고 아픈 감정을 느껴요. 이건 정말 흔한 부부싸움에 관한 기억이겠죠. 평범하고 흔하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들이지만 저에게는 사소하지도 않고, 상처를 주는 기억이에요. 이것 말고도 부부싸움에 대한 기억은 많죠. 지금 제 생각은 이래요. 이렇게 십수년간 마음을 얻어맞았는데 마음이 아프지 않으면 정상일까요?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사소하다고 무시해왔지만 이런 아팠던 기억들... 얼마나 있으신가요?) 


 이상하게도 대부분은 남한테 받은 상처이고 저는 피해자인데도 상처에는 대부분 수치심, 죄책감, 초라함, 자기비난이 같이 붙어있더라고요. 상처를 떠올려서 다시 고통받고 싶지도 않았고 상처에 딸려오는 수치심, 죄책감, 초라함, 자기비난은 더더욱 마주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잊어버리려고 했고, 정말로 잊는데 성공했어요.   


 잊어서 완전히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상처들, 부정적인 감정들이 제가 모르는 곳에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는 우울증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떤 엄마가 아이를 일찍 떠나보내는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그 엄마가 죽는 날까지 우울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그게 이상할까요? 상처를 받았으니까 마음이 아픈거지 우울증이라는 병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니죠. 저는 지금의 제 우울증에 대해서 이게 그냥 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맞으면 아프고, 칼로 찌르면 피가 나오고, 물을 마시면 소변이 나오는 것처럼 원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많이 맞았어요. 그래서 아파요.


 물론 우울증에 대해서 가장 처음에 접근할 때는 우울증을 병으로 인식하는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울증의 증상들을 실제 나 자신이 게으르다거나 성격이 어둡고 꼬였다거나 못생기고 뚱뚱하다거나 무능력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자기 자신'으로 믿어버리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궁극적으로 답은 자신을 제거해버리는 것밖에 남지 않아요. 


 우울증이 그동안 경험한 상처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부터는 상처를 넘어서서 우리가 다루기 정말 힘든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려요. 끝없이 무기력하고 매순간 자기 자신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생각, 말, 기억, 상상 같은 것들이 덮쳐와서 죽을만큼 고통스럽죠. 그럴 때는 어떤 상처든, 원인이든 파고들어가는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일단 날뛰고 있는 우울증의 증상 자체와 싸워야하죠. 우울증을 나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 병이라고 인식하고, 자기비난이나 죄책감, 수치심이 들 때마다 '아, 이건 내가 실제로 비난받을만하거나 잘못을 했고 수치스러운 존재라서 그런게 아니라 우울증이 발작하는 거야'라고 인식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는게 중요해요. 즐거운 일들을 억지로라도 경험하고 최대한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 수 있게 해줄만한 활동들, 그리고 약을 통해서 우울증을 힘껏 밀어내야 하죠.


 저는 올해는 우울증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자기비난, 죄책감,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생각, 기억같은 것들이 많이 힘든 순간을 제외하면 거의 떠오르지 않아요. 많이 힘들어서 그런 것들이 떠올랐을 때도 전투에 돌입해서(?) 반나절 정도만에 치워버리는데 성공했어요.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어느정도 남아있지만 그건 지금 저희 집이나 제가 처한 상황이 자살을 생각할만큼 힘들기 때문이에요. 아빠가 저에 관한 걱정, 불안 등으로 자살하고 싶을만큼 괴롭다는데 제가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는 어렵잖아요.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죽고 싶을만큼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와중에도 행복감을 느끼고 여러가지 일들을 열심히 해내기도 하고요. 어떻게든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새로운 인생에 관해서도 부쩍 생각해요. 아무튼 우울증의 증상 자체가 가져다주는 '매순간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에서는 거의 해방되었죠. 지금은 힘들어도 막연히 힘들고 그냥 죽고 싶은게 아니라, 정확히 어떤 일 때문에 힘든건지 알 수 있어요. 


 고통에서 해방되니까 저를 돌볼 수 있는 힘이 어느정도 생긴 느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다룰 힘이 없어서 묻어두었던 상처들로 다시 돌아오게 되네요. 이제는 과거의 상처들, 매일 제가 새롭게 입는 상처들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해요. 20년 전의 어떤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는 별 상처가 아니라도, '그때의 나에게는 큰 상처였다'라는 걸 인정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그때 그것때문에 힘들었구나, 마음이 많이 아팠구나'하고 저의 감정에 공감하고 다독여줘요. 쉽게 떠오르지 않는 상처도 일단 '떠올라도 괜찮다'고 인정해주고 찾아보려고 해요.


 그런다고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아요. 이건 1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여전히 아프고 저의 삶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묻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최대한 상처들을 잘 알아보고, 그것때문에 아팠던 제 마음을 위로해주고, 그래서 그 상처들이 흘리는 피(우울감, 불안감, 후회, 죄책감, 수치심, 자기비난, 초라함, 자살충동 등등)를 그때그때 닦아내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모여서 우울증이라는 병이 되면 곤란하니까요. 우리가 매일 세수를 하는 것처럼 마음도 부정적인 것이 묻을 때마다 씻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부터는 이제 우울증의 치료에서 벗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울증에서 벗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요? 무한 긍정에 회복탄력성이 높고 항상 행복감에 넘치는 사람이 되면 우울증에서 나은 걸까요?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삶은 우울증이 없어도 원래 고통스러워요. 우울증 환자들이 삶의 고통을 더 크고 더 민감하게 느낄 뿐, 우울증이 없어도 삶은 힘든 것 같아요. 생로병사의 고통에 눈뜨고 왕자의 자리도 박차고 나와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싯다르타는 우울증 환자였을까요? 그의 고뇌에 동감하면서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깨달음에 관심을 가져온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우울증 환자들이었을까요?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증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맞서 싸우면서 본의 아니게 구도자의 길도 함께 걷게 되는 것 같아요.ㅎㅎ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을, 사물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죠. 과거를 후회하는 것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무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그리고 이건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과 비슷해요. 깨달음이라는게 대단한건 아니었죠.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와 인간사의 온갖 고통들에 압도되지 않고 삶을 살아가고 싶어했어요.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우울증 따위는 치워버리고, 삶 자체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직접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집에 오는 길이 정말 추웠어요. 6시만 되어도 깜깜해지고 찬바람이 몸을 파고드는 느낌이었죠. 저는 이 계절을 좋아하지 않아요. 늦가을의 추위는 저의 몸도, 마음도 얼어붙게 만들죠. 그 이유는 이 계절에 아픈 기억이 많아서 그래요. 무기력증 때문에 문제집 한 권 풀지 못하고 울고 죽고 싶어했던 수능 시험 전날의 기억,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시험을 치고 '이번에는 제발...'하면서 기대하는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길의 어둠, 추위, 그 공허함... 두려움... 열심히 시험을 쳤을 거라고 기대하고 매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두셨던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그것을 다섯번이나 견뎠던 기억. 그리고 그 뒤로도 시험에 관한 비슷한 기억들이 있었죠. 그 기억들 때문에 저는 늦가을의 추위와 어둠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울한게 아니라,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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