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등학교 자퇴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쓴 글입니다. 자퇴하고도 잘 살아내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힘들었던 이유, 부모의 입장에서 자퇴하는 자녀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에 관한 생각들을 한번쯤 써보고 싶었어요. 그 점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퇴, 그거 쉬워보이는데...]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자녀가 고등학교 자퇴를 앞두고 있다는 글을 두편이나 보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두 가정 모두 담담하게 자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퇴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나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자퇴는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쯤 되면 항상 친구와 붙어있어야 되는 나이도 아닌 것 같고, 어차피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는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어설프게 학교 수업을 듣느니 차라리 학원이나 인강으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게 나아보이기도 한다. 통학 시간이나 반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해야되는 시간을 아껴서 취미생활도 하고 가족끼리 여행도 다녀오고 하면 더 좋은 인생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은 길어봐야 3~4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는 또래들과 함께 대학에 가게 될 거고 다시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 고등학교 자퇴를 앞둔 가족들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게 십몇 년 전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을 때 나와 우리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자퇴를 말리고 싶은 이유]
부모님은 생각외로 고등학교 자퇴를 쉽게 받아들이셨는데, 두분 다 연세에 비해 오픈마인드라 자퇴에 대한 편견이 없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내 결정을 존중해주셨기 때문에 딱히 반대할 생각을 안하셨던 것 같다. 자퇴로 인해 손해보는 것이 없었다는 이유도 컸을 것이다. 남들이 학교에 다닐 시간에 공부에 집중해서 명문대에 가면 오히려 이득이라는 생각이랄까.
내가 봤던 고등학교 자퇴에 관한 글에서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자퇴 후의 공부 계획을 짜왔고 원하는 대학이나 목표도 분명했다. 부모들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자퇴를 경험해본 입장에서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나는 가능하다면 자퇴를 말리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퇴하고 어떤 교육기관에도 속하지 않은 채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상황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가는 것은 좋다. 1년 후에 다른 학교로 재입학하는 것도 상관없다. 해외로 배낭여행을 가거나 유학을 가는 것도 좋다. 요리 학원이나 기타 전문 분야의 교육을 받으면서 취업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자퇴하고 홈스쿨링을 하거나 입시학원에 다니는 것 정도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냥 학교에 다니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자퇴는 우울증이나 은둔형 외톨이 생활로 이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아마 선뜻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아이는 성실하고 밝은 아이고 지금까지 잘 해왔고 엄마, 아빠가 옆에서 지지해주면 특별한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을 수 있다. 가정환경에 특별한 문제도 없고 아이도 긍정적인 성격인데 우울증에 걸리는건 말도 안되고, 친구들하고 잘 노는 애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건 불가능해보일 수도 있다.
[자퇴와 우울증, 은둔형 외톨이의 관계]
하지만 우울증은 가랑비에 옷 젖듯 다가온다. 충격적인 사건이나 장기간의 학대가 있어야만 생기는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만 없어도 쉽게 생길 수 있다.
(1) 매일 대화하는 친구
(2) 학교 등 소속되어있는 공동체
(3) 매일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일 (ex. 등교)
가족과 친하고 충분히 대화를 나누더라도 친구가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학교에 다니는 등 어떤 사회에 소속되어있을 때는 친구가 없어도 괜찮다. 학생이라는 신분, 학교라는 갈 곳, 이름이라도 아는 반 아이들, 우리반 담임 선생님 같은 것들이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자존감을 받쳐주기 때문에 외로움이 우울증으로 번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런 사회적 연결점도 없이 고립되어 있을 때 친구까지 없으면 외로움은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소풍 때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나만 남겨두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버스에 타고 학교로 돌아간다. 나는 혼자 남겨졌는데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도 모른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멀어져가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때의 외로움이란 이런 느낌이다. 아이는 가정안에서 성장하지만 동시에 사회안에서도 자라야 한다.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아이가 어떤 사회에 소속되고 친구들에게서 얻어야할 자존감의 일부분을 채워줄 수가 없다.
처음에는 가벼운 우울증으로 시작한다. 잠이 늘거나 해야할 공부를 좀 미루거나 게임을 좀더 하게 되거나 하는 정도이다. 그럴수록 아이 본인이나 부모의 불안감이 높아진다. 학교도 안 다니는데 공부까지 게을리하면 진짜 낙오자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불안감이 높아지면 우울증이 더 깊어진다. 점점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보면 시험에도 실패하고 원래 계획했던 목표들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럴수록 우울증은 심해지고 나중에는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은둔형 외톨이들이 은둔 생활을 시작하는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밖에 나가야 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임 중독자가 하루종일 게임을 하기 위해 학교를 포기하고 은둔형 외톨이를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처음에 왕따나 다른 이유로 고등학교를 그만두거나 대학 졸업 후 취준 기간이 길어졌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집에 있게 된다.
밖에 나가야 될 사정이 없기 때문에 나가지 않게 된다. 부모형제 외에는 다 연락이 끊겨서 대화할 사람도 없다. 그 외로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겹쳐서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우울증이 오면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집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우울증 때문에 시험이나 취준, 이직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밖에 나갈 일은 계속 없게 된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은둔형 외톨이로 생활하게 된다. (참 쉽죠...)
고등학생은 겉은 어른같지만 속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고립감과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아무리 영리한 아이라도 그렇다.
더욱이 고등학생은 아직 사춘기의 폭풍 속에 있는 시기이다. 누구나 가볍게든 심하게든 우울증 증상들을 제대로 체험하게 되는 사춘기 말이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신체적, 정신적 변화로 인해 우울증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다.
이게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오랜기간 은둔형 외톨이로 살면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던 일련의 과정이었다.
[왕따라도... 한번 버텨보면 어떨까]
물론 고등학교 자퇴를 결정한 데는 왕따같은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왕따를 겪어봤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짓밟는 폭력인지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에도 자퇴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퇴를 했을 때 잃는 것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우울증, 무기력증, 은둔형 외톨이, 사회성 더 떨어짐, 친구 없음, 대입 실패, 인생 망함.
왕따를 시키는 인간들이 개같은건 맞지만, 그 개들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망칠 필요가 있을까. 망하는건 걔들이라야지 왜 내가 망하나? 잘못한 것도 없는 내가 왜 도망치고 숨어야하나?
숨기시작하면 그때부터 열등감이 시작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왕따시킨 그놈들이 잘못한게 아니라... 나는 구제불능의 찐따 새끼라 어딜가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믿어버리게 된다. 왕따라는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그냥 피했을 때 나타나는 진짜 후폭풍이다.
학교는 원래 엿같은 곳이다. 성격도, 관심사도, 배경도 다른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3년 내내 살 부딪치면서 경쟁하게 만드는데 거기가 정상일리 없다. 대학 입시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는 상황도 고통스럽고, 그런 압박감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이들이 서로 잘 지내는 것도 너무 힘든 일이다.
학교가 즐거운 곳이라고 착각하면 학교의 현실을 더 견디기 어려워진다. 내가 부적응자라 나만 학교가 힘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학교 가는게 고통스러우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느껴진다.
NO. 학교는 원래 즐거운 곳이 아니다. 학교는 버티라고 있는 감옥이다. 다행히 기간이 정해져있다. 3년만 버티면 된다. 친구같은거 필요없고 혼자 밥 먹어도 된다. (혼밥해도 뻘쭘하지 않게 점심시간에는 학생들도 휴대폰 사용이 필요하다...) 부모님 돈으로 심리상담도 받으러 다니고 필요하면 병원이라도 다니면서 최대한 버티자.
그냥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고, 매일 마주치는 아는 얼굴들이 있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고, 아침마다 등 떠밀려서 나갈 곳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바닥 없는 지옥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자퇴하는 아이를 위한 부모의 역할]
그럼에도 자퇴를 결정할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전학, 대안학교, 1년 쉬고 재입학 등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여건상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수능을 준비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1. 아이를 믿어주지 말 것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를 믿어주지 않는게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자퇴 후에 일어날 일들을 감당하기엔 아직 어리다. 아이가 세운 계획들을 아이 스스로 알아서 하게 놔두고 실패했을때 아이에게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퇴를 결정한 순간 아이는실패할 확률이 높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학교를 벗어나 혼자 커리큘럼을 짜고 혼자 공부한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만큼 자퇴는 아이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출발점이 아니라,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온전히 책임지고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이를 내버려두지 말고 부모가 나서서커리큘럼을 짜는걸 도와주고, 매일의 작은 목표를 세워주고, 이것을 지키도록 당근과 채찍을 쓰면서 아이를 데리고 나아가야 한다.
매일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아이가 게으름을 피울 때 이것이 계획이 버거워서인지 아니면 우울증의 증상인 무기력인지 체크하는 것도 부모가 해줘야 되는 일이다.
2. 친구를 만들어줄 것
물론 자퇴하는 아이에게 친구가 많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믿을게 못된다. 학교를 계속 다니는 사람과 자퇴한 사람은 환경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기도 하고, 아이가 우울증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할수도 있다. 자퇴를 계기로 연락이 점점 끊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가 알아서 친구들을 만나겠거니 하고 놔둘게 아니라 부모가 직접 친구를 만들어줘야 한다. 예를들면 고등학교 자퇴를 결정한 학부모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같이 만나면서 정보도 공유하고 노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알아보고 아이가 참여하게 도와주는 것도 방법이다. 아이는 거기서 마음맞는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다.
친구를 만들 방법이 여의치 않거나 아이가 또래 친구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꾸준히 심리상담을 받게 해주는 것도 방법이다. 심리상담은 심각한 문제가 있어야만 받는게 아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상담사는 아이에게 친구의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이다.
3. 매일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 것
운동을 같이 다니는 것도 좋고 근처 마트에 심부름을 보내는 것도 좋다.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는 것도 좋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것도 좋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매일 밖으로 나가야 되는 일을 만들고, 그것을 지켰을 때 보상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한달간 매일 외출하기를 지켰으면 스티커를 모아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사주는 식이다. 밖에 나가고 싶게 예쁜 운동화나 구두, 옷을 사주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소한 노력이 아이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을 막을수 있다. 특히 운동은 우울증을 예방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