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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un 17. 2020

밥값, 했어요

육개장 이야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밥에는 대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친구가 밥을 사주면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번에는 내가 밥을 살 차례라는 것을 메모해둔다. 얼굴만 알 정도의 지인이 갑자기 비싼 식당에서 밥을 사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식사 내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고민했다. ‘여기 인당 5만원은 넘을 텐데... 나한테 왜 밥을 사주는 걸까? 이걸 뭘로 갚지?’


 그런 생각이 자리잡게 된 계기는 집밥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엄마가 매일 삼시 세끼를 차려주는 것은 대가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희생에 가깝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는 밥과 나의 공부 사이에 대가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하라는 숙제는 안하고 밥상 앞에 앉아서 신나게 분홍 소시지를 집어들면 엄마의 눈초리가 곱지 못했다. “넌 숙제도 안해놓고 밥이 넘어가니 지금?” 엄마가 잔소리를 꾹꾹 눌러 참는 날에는 유독 설거지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가 시험에서 100점을 맞은 날 혹은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아오는 날에는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불고기를 볶고 잡채를 무치셨다. 때로는 갈비찜도 상에 올라왔다. 갈비를 사다가 여러 번 핏물을 빼고 데치는 과정 내내 허리 한번 못 펴고 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즐거워보였다. 다른 때라면 기름기 범벅인 설거지 더미에 한숨을 쉬었을 텐데도. 마무리는 아빠가 사온 케이크였다. 그때의 밥상은 참 행복했다.


 내가 어릴 때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걸핏하면 냉랭한 기운이 도는 식탁에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나의 성취였다. “오늘 국어 시간에 발표를 잘해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라거나 “오늘 영어 학원 퀴즈에서 내가 1등해서 상으로 초콜렛 받았어.”라는 말이 화기애애한 저녁식사를 위해 꼭 필요했다. 그러면 부모님은 흐뭇해하면서 나를 매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셨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엄마는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을 잘 보는 것으로 밥값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행복한 밥상을 받을 수 없었다. 우리 집에 대가 없는 밥은 없었다. 그리고 대가 없는 사랑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꿈은 친구들을 따라 적어냈던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무엇이든 부모님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직업’이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버리고 부모님이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다가 우울증에 걸렸다. 병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힘이 없게 되었다.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취직도 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공황증상이 나타나 숨이 막히고 쓰러질 것 같았다. 죽고 싶진 않았지만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밥값도 못하면서 끼니때는 잊지 않고 밥을 퍼먹는 내가 식충이 같았고, 살아있는게 가족에게 민폐 같았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때는 아빠가 우울증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 나를 굉장히 한심하게 생각했고 화도 많이 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나에게 화를 냈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자기도 죽고 싶다고 소리쳤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달래면서 산에나 가자고 했다. 아빠가 등산 배낭을 챙기고 씻는 동안 엄마는 내 방문을 두드리고 점심으로 뭐 해놓고 갈지를 물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오기 전에 죽어있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가 걱정할까봐 육개장을 먹겠다고 했다.


 집에 육개장 사발면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고, 컵라면은 엄마가 수고스럽지 않아도 되어서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음식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데리고 나가기 전에 다시 내 방문을 두드리고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저쪽에 육개장이 있고 김치는 냉장고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음식에는 관심도 없었고 계속 엄마, 아빠를 마주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대충 응응 하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한참 울다가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김치 그릇 사이에 종이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엄마의 글씨였다. ‘육개장 먹을 때 김치.’ 엄마는 서른 넘은 딸이 김치도 못 찾을까봐 쪽지를 써두고 간 거였다. 쪽지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아까 엄마가 점심밥 위치를 알려주려던 걸 흘려들은게 미안해져서 엄마가 육개장이 있다고 말한 곳으로 가봤다. 그런데 거기에는 육개장 사발면이 있는게 아니라 진짜 육개장이 있었다.


 엄마가 속성으로 끓이는 육개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홍두깨살이나 양지, 사태를 두어 시간 물에 담가 핏물부터 빼고 삶아서 손으로 잘게 찢어야하지만 시간이 없을 땐 소고기 불고기감을 넣고 대파, 버섯, 고사리를 넣어서 볶은 다음 육수를 붓고 끓인다. 그렇게 해도 신기하게 육개장 맛이 난다. 대파와 고사리, 고기가 한데 뭉쳐지다시피 한, 뻘건 기름이 둥둥 뜬 그 육개장이 가스렌지 위의 냄비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어릴 때는 육개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한번도 엄마에게 육개장을 끓여달라고 한 적이 없다. 내가 훨씬 좋아했던 것은 육개장 사발면이었다. 그런데도 엄마 귀에 육개장이라는 말이 컵라면이 아니라 진짜 육개장으로 들렸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엄마에게 나는 육개장을 끓일 정성이 아까운, 그래서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게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바쁘게 외출해야할 때조차도.


 나한테는 내가 하찮았는데 엄마한테는 내가 하찮지 않았다. 엄마의 육개장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컵라면이었으면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엄마가 직접 만든 음식은 도저히 남길 수가 없었다. 육개장에 밥을 말아서 한 숟갈 입에 욱여넣었다.


똥손이라.. 고기들은 밥 아래에 깔려있어요..ㅋㅋ


 누군가 외국에는 국밥 같은 서민 힐링음식이 없어서 강력범죄가 많은 거라는 농담을 했는데 진짜 근거가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펄펄 끓는 국물 속에서 살짝 퍼진 밥알들이 덩어리째 식도로 넘어가는게 느껴진다. 꾸역꾸역 국밥을 밀어 넣자 땀이 쫙 빠지면서 목구멍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응어리까지 함께 밀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눈물 반 땀 반으로 육개장 한 그릇을 비웠을 때 자살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삼시 세끼 밥을 잘 먹을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씩씩하게 밥을 먹는다. 쌀 한 톨 사오지 못하는 백수라도, 방안에서 뒹굴면서 게임을 하는 게임 중독자라도, 남들에게는 그저 폐인으로 보일뿐인 캥거루족이라도 나는 언제나 밥값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엄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데... 내가 엄마에게 효도하려면 엄마가 사랑해주는 ‘나’라는 사람에게 좀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밥 굶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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