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낸 날은 상관없는데 못 보낸 날에는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난감하다. 솔직한 대답은 이랬다. "아니, 못 보냈어.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목이 꽉 막힌 것 같아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몇주째 복용하는 스테로이드 부작용 탓인지 여기저기 아프고, 약을 먹어도 두달째 계속되고 있는 복통이 큰병일까봐 신경쓰이고 돈 나갈 일이 겁나. 자꾸 아프니까 힘들고 우울해. 앞날도 막막하고 불안하고답답해. 오늘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병원 갔다온 것밖에 안한듯."
(이렇게 확 질러버리고 싶었다...)
요즘 나는 괜찮지 않다. 올해는 약을 안 먹은 날을 다 합치면 2주가안될 것 같다. 연달아 찾아온 장염, 폐렴 이후로 돌림노래처럼 병이 생겨서 약을 달고 살았다. 마음 건강의 상당부분이 몸 건강에 달려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몸이 불편한 와중에 마음이 편해지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방이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나의 하루에 대해 질문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위로를 받을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사실대로 시시콜콜 이야기하는건 나도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응, 잘 보냈어.ㅎㅎ" 내지는 "응, 그럭저럭.ㅎㅎ" 이라고 적당히 덮고 넘어가기엔 그런 말을 해야된다는 것 자체가 피로했다. 내 상황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괜찮다는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을 안심(만족)시켜줄 에너지까지는 없었다.
왜 나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는 거짓말을 해야되는 걸까? 왜 상대방은 내가 괜찮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걸 대충은 알면서도 오늘 하루 잘 보냈냐는 질문을 하는 걸까?답이 뻔한 공허한 안부를 묻는게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걸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공허한 안부를 묻고 공허한 걱정을 할 때도 많으니까 사실 할 말은 없다. 진심이 없어서 공허해지는게 아니라 고통은 나누기 어려운 거라서 공허해진다.
고통을 겪을 때는 딱 자신의 몸에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과 이것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보는 입장일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몰라서 피차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거리에서 멈추게 된다.
대안이 있다면, "오늘 잘 보냈어?ㅎㅎ"라는 물음 대신 "오늘 어떻게 보냈어?","오늘 뭐했어?", "지금 뭐하고 있어?"처럼 예/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주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예/아니오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사실상 "예."로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게 물어봐줬다면 오늘 병원 다녀온 이야기라도 가볍게 꺼낼 수 있었을 거고 최소한 '괜찮다, 잘 지낸다' 라는 거짓말을 안해도 되니까 덜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질문이 그나마 덜 힘들고, 고맙게 느껴진다.
아무튼 상대방에겐 죄가 없다. 별거 아닌 질문에 짜증난 나도 죄가 없다. 병이 나쁜거다.ㅜㅜ 빨리 다 나아서 안 아픈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