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인생이 아니었으니까

by 오렌지나무


첫번째 상담, 그러니까 2022년 12월에 받은 상담은 '분석과 주입'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인생을 분석했다.




"지금까지 오렌지나무님은 누구의 인생을 살았어요?"

"아빠의 인생요."

"그럼 그 실패했다는건 누구의 실패죠?"

"아빠의 실패요."


"오렌지나무님이 그 직업을 원했나요?"

"아니요."

"그럼 오렌지나무님은 그 직업을 안 가진거지 못 가진게 아니에요. 오렌지나무님이 원해서 도전한게 아니니까요."


"오렌지나무님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재밌는걸 하면서 사는거?"

"맞아요. 행복은 매일 내가 하고싶은걸 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럼 오렌지나무님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죠?"

"매일 제가 하고싶은걸 하면서요."




이게 그 상담의 핵심이었다. 분석은 명쾌했다. 그리고 하나 하나 맞는 말이었다. 다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믿는건 다른 문제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매 회기마다 이 내용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주입시켰다. 지금은 내 머릿속에 잘 뿌리 내리고 있다. 어쩌면 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맞는 말을 알려줘도 못 믿고 자책하니까 아예 그냥 세뇌시키는게 맞는지도...


그리고 내가 뭔가 왜곡된 인식을 하고있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분석에 들어가서 파헤치고 정리하고 결론을 다시 입력하는 방식으로 상담을 진행했다. 특히 내 머릿속에 있는 아빠의 생각들과 열심히 싸웠다. 6회기쯤 지나자 남는게 별로 없을 정도였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부모의 역할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식을 책임지고, 자식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도록 지지해주는 거라고. 그런데 아빠는 그 역할을 못했고 나는 내가 받아야 할 사랑(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그래서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거기에 맞춰 인정받고 살아가려고 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시험에 실패하고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아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자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내가 피해자인데 왜 죄책감을 느끼냐고.


나는 유리잔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스스로가 유리잔인걸 잊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뭔가 해주고 내가 변화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힘들어진다고...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때는 상담사 선생님이 약간 본인 의견을 강요한다는 느낌이었는데, 나에게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맞는 말이고 덕분에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됐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상담 후로 아빠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서 내가 별것 아닌 일에도 심하게 화를 내게 됐다는거... 내 인생을 망친 것에 대해서 아빠에게 화가 났다.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마지막 회기가 끝났다.


그 분노는 나를 치유하는 건강한 분노였지만 한동안 가정에서도, 나 자신도 좀 많이 힘들었다. 아빠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미웠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화가 났다.


그 분노가 가라앉고 내 인생은 아무것도 망가진게 없다는 지점에 이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담에서 아무리 정리가 잘 되었어도 결국 내 인생에서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내 몫으로 남았다.


생명의 전화 종합사회복지관 덕분에 좋은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여덟번의 만남이 다 의미있었다. 다시 태어난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상담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아서 불안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