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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Sep 02. 2024

우울증 생존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오랜만에 꺼내본 나의 책


나는 우울증 생존자이다. 우울증이라는 재난을 겪었지만, 살아있다.


우울증에 걸렸던 사람들이 이게 재난이라는걸 알면 좋겠다. 누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자존감이 낮아서도 아니고, 사랑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나약해서도 아니고 그냥 누구에게나 갑자기 무작위로 찾아올 수 있는 재난이란걸. 그냥 지나가다 폭탄을 맞은 거라는걸.


그래서 최소한 자기비난은 안했으면 좋겠다. 우울증에 걸린 것조차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재난 생존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주위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지금은 우울증에서 많이 벗어났다. 약을 안 먹어도 예전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거나 생활이 바닥을 치진 않는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재난이 내 삶에 남긴 공백, 망쳐버린 것들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게 제2의 우울증이 되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재난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과 같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새로운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잃은걸 생각하는 대신 지금 나에게 주어진걸 생각하면서.


그게 진짜 어려운데 뭐랄까... 캔버스에 점을 찍는 것처럼 살고 있다. 내 방식은 '뭐든 한다'이다. 그게 점을 하나 찍는 거라고 한다면, 그게 수백 수천 수만번 쌓이면 언젠가는 캔버스가 색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무슨 색일지, 내가 그 그림에 만족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기에 일단 그렇게 살고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처럼. 이런 시간들이 언젠가는 무엇이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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