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Sep 02. 2024

은둔형 외톨이가 좋았던 점


하완 작가님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내 은둔형 외톨이 생활이 불행하기만 했던건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나는 대략 10년 정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왔는데 이력서에서 도저히 커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백기였다.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이 에는 듯 외롭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돈을 벌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우울증 투병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인생을 대책없이 낭비한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아무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직장인의 번아웃에서 시작된 이 책을 읽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직장을 안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나름 축복이 아닐까 싶다.


나는 통으로 주어진 하루의 즐거움을 안다. 끝없이 뒹굴뒹굴할 수 있는 행복감도 안다.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이 없는 삶도, 나를 괴롭히는 주위 사람들이 없는 삶도 잘 안다. 지겹도록 잘 안다.


사회적으로는 폐인같은 시간이고, 개인적으로도 우울증 때문에 고통받던 시간이긴 했지만 어쩌면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던 건지도 모른다.


아침 10시쯤 느긋하게 일어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옷을 고른다. 정독 도서관에 가끔 갔는데 그곳의 파란 하늘과 나뭇잎, 형형색색의 꽃들이 기억난다. 적당히 따뜻한 오전 바람과 수많은 책들 속에서 황홀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나는 은퇴 후의 삶을 젊었을 때 미리 살아본 행운아였다.


그 여유로운 시간이 있었기에 40대가 된 지금 번아웃은 커녕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나 자신과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우울증과 맞서 싸우는 나만의 방법을 그 덕분에 알게된 것이 아닐까.


물론 다 지나간 후의 이야기이다.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의 현재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불안해하고 불만족스러워하는 것들도 미래의 내가 본다면 '그때 이래서 행복했었지'의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행복했고,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생존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