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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사람인걸 처음 알았다

나에 대한 연민도

by 오렌지나무


세번째 상담은 올해 초,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에서 받았다. 거의 연달아 상담을 받다보니 좀 자포자기한 기분이었다. 몇주째 개복상태로 여러 의사에게 여기저기를 수술받는 기분이었다.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또 보여줘서 지쳤고, 그럼에도 해결되는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오히려 내 마음속 흙탕물을 잔뜩 휘저어놓은 기분이라 힘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서울 심리지원 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은 작년 가을에 신청했는데 대기자가 많아 해를 넘겨서 받게 되었다.


잘된 일이었다. 나는 계약직이라 항상 1~2월은 쉬게 되는데 그때가 마음건강이 가장 안좋을 때였다. 집에 있기 때문에 아빠와 부딪치게 되고, 또 직장에 안나가면 일상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계약직이라 다시 계약이 안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내가 몇번쯤 우울증이 다시 온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때가 있는데 대부분 그 겨울 즈음이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추웠던 겨울이었다.


서울 심리지원 동북센터는 덕성여대 안에 있는 덕우당이라는 한옥에 있다. 겨울의 한옥은 운치가 있다.


내가 상담사 선생님을 차마 보지 못하고 건조하게 내 이야기를 끝내자 선생님은 과거에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물어보았다. 감정이라... 내 상황을 깔끔하게 분석하고 결과를 주입시켰던 작년의 상담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의 감정들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내가 느꼈던 초라함, 부끄러움, 슬픔, 자괴감, 외로움... 그 감정들을 돌아보니 나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그 순간들의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참 어렸는데 자기가 어린 줄도 모르고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고, 공부가 안되는건 우울증이랑 ADHD 때문인데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울고 있었다.

나 자신을 연민하는건 드문 일이다. 나는 내가 싫을 때가 많았다. 미워할 때도 있었고 내 잘못이 아닌 줄은 알지만 내가 고장난 불량품같아서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감정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렸다. 내가 너무 불쌍했다.


다른데서 8회기를 마치고 더 흘릴 눈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눈물이 터졌다. 상처 밑에 더 깊은 상처들이 건드려진 느낌이었다. 대체 상처의 바닥은 얼마나 더 깊은 곳에 있는걸까. 끝을 알 수가 없다.


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오렌지나무님은 참 능력많고, 진짜 독하고, 만만찮은 사람이라고.


내가 바보같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나보다. 독하다고 생각한건 의외였다. 나는 독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항상 약했고 우울증에 끌려다녔다. 공부도 그렇고 난 한번도 의지력을 갖고 뭘 이뤄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담사님은 우울증에서 살아남아서 대학 가고 이렇게 직업 찾고 살아온 것 자체가 진짜 독하고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렇기도 했다.


그 오랜 우울증 속에서도 버텼고 죽지 않았던건 비록 그 과정 자체는 구질구질하게 느껴졌지만 진짜 초인적인 의지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의지력이 있는건 모르겠는데 없으면 불가능했다는건 안다...) 갑자기 스스로 뿌듯해졌다.


그 전에도 내가 잘해왔다는 생각은 가끔 했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니까 기분이 또 달랐다. 인정을 받을 때마다 새싹에 햇빛과 물을 주는 것처럼 내 안의 싹이 자라고 점점 풍성해진다.


이번 회기에서 얻은건 나를 연민하게 된 것, 그리고 내가 의지력 강하고 많은 성공을 이뤄왔다는 것.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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