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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May 23. 2023

기억의 상실

나에 대한 용서


우울증에 걸렸던 시간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단편적인 것들, 큰 사건들만 기억나고 세세하게는 기억을 못한다.


무기력해서 거의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비슷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많이 생각하고 뭔가 읽고 그랬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그래서 그냥 '20년의 우울증 기간'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게 된다.


우울증 기간뿐만 아니라 처음 이 브런치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때의 투쟁 혹은 투병도 잘 기억이 안난다. 가장 또렷한건 내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느끼는 2021년도부터이다.


다시 떠올리면 힘들어서, 구질구질해서, 내 인생의 백지라고 생각해서, 없애버리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시간들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그때의 시간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건데, 많은 것들이 제대로 분류도 안된 채 종량제 봉투에 담겨 무의식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지금은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중학교 이후의 나와 지금의 나는 20년이라는 시간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그 부분이 아쉽다. 일기라도 줄곧 써올걸. 가끔 써놓은 기록들이라도 남겨둘걸. 창피하고 고통스럽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다 찢어버렸다. 약할 때 글을 쓴다는건 치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같다. 자기에 관한 글을 쓰고 남긴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자기에 대한 긍정이니까.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 마다 그 시간들이 나에겐 재난이었고 트라우마로 남았다는걸 느낀다. 이럴 땐 내가 환자였다는게 실감난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을 긍정하지 못했고, 지금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안나 긍정할수도 없다는게 슬프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것들에 연민의 마음을 보내려고 한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절망속에서 울던 나라던가... 수능 전날 아무것도 준비가 안된 채 한밤중에 앉아있던 비참하고 두려워하던 나라던가... 그런게 생각날 때마다 너 참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내 감정들을 글로 남기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그때 내가 혐오하고 지워버렸던 나에게.

그렇게, 상처의 면적을 줄여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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