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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un 02. 2023

아빠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안의 심판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인연처럼 질기고 끊을 수 없는게 같은 관점을 공유한다는 부분같다. 특히 부모와 기질적으로 비슷한 경우엔 더 그렇다.


엄마는 내 인생을 한번도 쓰레기로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은둔형외톨이 시절에 나를 살리기 위해 했던 일들(그림 그리기, 사람 만나기 등등)을 한번도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빠와 다르게.


성과, 효율, 결과를 중요시하는 아빠에게는 모든 것이 시간 낭비이고 딴짓거리였다. 그리고 아빠 기준에서는 작년까지의 내 인생은 가치없는 것이었다. 사회적인 성취가 없었으니까.


보는 관점에 따라서 나는 길고 긴 고난의 길을 걸어온 끝에 사는데 성공한 우울증 생존자일수도 있고, 우울증으로 인생의 중요한 경력들을 망치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삶의 패배자일수도 있다.


전자는 엄마의 관점, 후자는 아빠의 관점이다.


나는 후자쪽에 많이 기울어있다. 아빠와 성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엄마와 달리 자기주장이 강한 아빠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뇌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빠와 내가 공유하는 기질의 특징은 '불안감'이다. 불안한 사람에게 삶은 고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생에 그저 불행과 그것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밖에 없다. 불안한 사람은 삶의 위험요소들을 피하기 위해 항상 긴장되어 있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강박적이다.


우리에겐 일어난 불행이 차라리 일어나지 않은 불행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수십년간 매일 하늘이 무너질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바랄수도 있다.


그게 아빠의 모습이고 그건 나에게도 유전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인생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숙제같다고 느꼈다. 아빠도 그랬다. 그래서 아빠는 나에게 원하는 대학이 있고 직업이 있었다. 그러면 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스스로의 보상심리도 있었지만.


십수년간, 그리고 기질적으로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내 머릿속에 있는 아빠를 느낄 때가 많다. 아빠의 눈으로, 아빠의 필터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낀다.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판자도, 나 스스로에게 가장 실망한 내 마음도 전부 아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카프카의 글에서 심판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아버지라는 거대하고 설득되지 않는 심판자, 즉 '성'을 항상 의식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내 안의 심판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느새 내 안에 동화된, 그래서 분리할 수 없는 심판자를 떼어내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서고 싶다. 내 기준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싶다.


약 덕분에 이전만큼 불안하진 않은데 마음의 본질적인 문제는 약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약이 불안이라는 무거운 증상을 들어올려 준 사이에 그동안 깔려있던 내 다리를 빼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봐야 할까. 그럼 괜찮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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