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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un 03. 2023

예쓰 모으기

굿즈 정리, 인생 정리

나는 예쁜 (그렇지만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들을 모으는걸 좋아한다. 어딘가에 가면 기념으로 물건 하나는 꼭 사온다. 박물관이든 전시회든 어디든 가면 팜플렛이나 굿즈 한두개는 챙겨오는 습관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처럼 굿즈가 많은 곳은 특히 위험하다. 전시작품과 유사한 것들을 파는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환기 미술관에서는 다이어리와 엽서를(이건 지인분께선물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민화체 고양이가 그려진 네임택을, 그리고 어느 조각보&매듭공예 전시회에서는 매듭 노리개를 사왔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수년간 써본 건 다이어리밖에 없다. 네임택은 포장만 뜯은 채로 서랍에 있었고 매듭 노리개는 장식으로 방에 걸려있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만나서 생긴 물건들도 있다. 어느 카페에서 불교의 화두를 들으며 같이 그림을 그렸던 엽서들, 그분이 인사동 골목의 어느 전시회에 갔다가 받아오신 작품 엽서들, 비자립청년 모임 친구들과 춘천에 놀러갔다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 등등.


마을활동을 하다보면 특히 물건들이 많이 생긴다. 여기저기 교육을 받으면서 수료 기념품으로 받은 것들, 여러 단체들에서 챙겨주신 것들, 친분있는 분들이 속한 사회적 기업 등에서 사온 물건들 등등. 그리고 평소에 마을 어른들이 챙겨주시는 텀블러며 옷들이며 그릇이며 여러가지가 많다.


이번에 집수리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책상을 비우다보니 그런 것들과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스티커는 대부분 노트에 붙이고,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물건들은 놔두고, 평생 먼지만 뒤집어쓸 것 같은 물건들은 버렸다. 못다 버린 것도 있지만 집이 정리되고 나면 아무렇게라도 쓰려고 한다.


예쁘지만 쓰지 않는 이유는 뭐였을까. 텅빈 굿즈 노트에 뭔가를 쓰면 곧 후회한다. 계속 간직하고 싶은걸 망쳐버린 느낌이 든다. 글은 몇년만 지나도 유치해지니까. 그래서 결국 못 쓰고 백지인 노트들이 많다. 물건들도 닳으면 보기 싫어지고 결국 버리게 될 것 같아 쓰지 못한다. 완전하게 남기고 싶다. 그게 그 물건의 쓸모가 아닌데도.


어쩌면 내 삶도 예쓰였는지도 모른다. 뭔가 삶을 맘대로 써버리면 후회할까봐, 망친게 될까봐,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지레 주저앉고 아무것도 안하고 살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연애도, 커리어도. 뭐라도 제대로 시작해보고 망하든 잘되든 도전하고 뛰어올랐던 기억이 별로 없다.


이번에 굿즈들을 정리하면서 마음도 정리해본다.

뭐가 됐든 내 인생을, 내 몸을, 내 생명을 한번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막. 막. 막.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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