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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Jul 27. 2023

신앙... 그 어려운 것


나는 라파엘라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9. 29.이라는 다른 생일도 갖고 있다. 세례로 생긴 정체성이다.


한때는 매일 울면서 미사에 참석했던 때가 있었다. 텅 빈 성당에서 무릎꿇고 기도드린 적도 많았다. 매주 금요일에 피정을 가서 어둠속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깊은 우울증 속에서 절망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 코로나 이후에는 성당에 간 적이 없다. 처음에는 코로나가 공포스러웠고, 그 후엔 안가는게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잊은건 아니고 기도도 자주 했다.


...라는 핑계를 대지만 홀했던건 사실이다. 우울증이 좀 나아지면서 종교에 대한 간절함이 줄어든 면이 없지 않다. 이제는 울면서 여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하는 일은 없으니까.


어쩌면 지금이 나의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인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없는 나에게 신앙은 또 어떤 의미일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몇달을 뭉개고만 있었다.


얼마 전부터 묵주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다가 실패했고, 그 후로 서너번은 끝까지 했지만 어쩐지 영혼없이 한 것 같아서 별로였다.


이제는 신앙이 없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 신앙을 떠나 마음껏 누군가를 미워하고 마음껏 불평했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얼마 전,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 주위의 어떤 아픈 사람, 수해를 입은 분들,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신앙이 없더라도 기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가 그분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더라도 내 마음을 위해서라도.


그런데 그때 기도를 하면서 다시 내 안의 진심, 신앙심을 느꼈다. 내 마음이 열리고, 충만하고 평온해지는 느낌... 내가 느끼는 신앙은 항상 이런 내 안의 '마음'이었다.




우연히 약속을 잡았는데 근처에 명동성당이 있었다. 내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자연스럽게 들렀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슴푸레한 성당 안에서 나는 기도하면서 고해를 했다.


나에겐 몇년간 쌓인 죄들이 많았다. 고해성사도 받았으면 했는데 시간이 안맞아서... 대신 하느님 앞에서 이야기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미움들, 내가 실제로 잘못한 일들, 남에게 모진 소리를 했던 것들...


분명히 고해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요즘의 근황, 속상한 일들을 털어놓고 '이거 좀 들어주시면 안돼요?', '아니에요, 저한테 안좋은거면 들어주지 마세요.' 등등 징징대고 있었다. Jasomirgott 처럼.


오랜만에 집에 와서 서러웠던 것들을 다 일러바치는 애가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묵주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피할 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갔다. 평소에 빵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그날은 유독 빵냄새가 좋았다. 홀려서 갓 구운 소금빵 하나를 먹었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빵과 소금. 오랜만에 집에 온 기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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