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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02. 2023

미술관, 감정서가, 박물관

휴가 첫째날

다육이는 먹는거 아니고 같은 녹색이라...


휴가 첫날은 친구와 함께 보냈다. 명동성당에서 만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친구가 전부터 가고싶어했던 곳이었는데 마침 예약이 돼서 함께 가게 되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오설록 티하우스에 갔다. 초록색 의자들이 눈에 확 띄었다. 분위기상 차를 마셔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뜨거운건 못마시겠어서 녹차라떼 아이스를 주문했다.



친구는 내 멘토이기도 하다. 요새 어땠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보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그날 아침까지 하고 있었던 고민들을 다 풀어놓았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더니 핵심들을 짚어주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들이었다.  혼자 끌어안고 있던 고민을 펼쳐놓고 친구와 함께 들여다보자 나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내 선택에 달려있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얼버무리며 주저앉고 싶진 않은데 아직 확신도, 자신감도, 밀고 나아갈 힘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 전시의 핵심은 이 '느낌표'로 요약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느낌표들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덤불은 곰이다(로즈마리 트로켈), 구름III(안네 임호프), 달을 잡는 자(라킵 쇼)... 이 작품들이 제일 좋았다. '달을 잡는 자'의 인물이나 꽃들은 인도 신화적인 분위기이면서도 채색은 현대적인 느낌이다.


달을 잡으려는 자는 달의 신 찬드라일까. 크리스털로 장식된 그는 밤의 왕이라는 느낌을 준다. 소마(달)에 취해있으면서도 방향을 잃지는 않고 똑바로 꽃들을 응시하고 감상하는 느낌.


밤의 어둠속에서 비정상적으로 화려하고 빛나는 꽃들은 생생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 같다. 욕망의 뿌리는 하나이다.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 혹은 그 '나'들이 모인 인류라는 집단. 때로는 집단 단위로, 국가 단위로, 종 단위로 내뿜는 그 욕망들이 숨가쁘게 느껴진다.


아무튼 소마에 도취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들을 하나 하나 알아차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좋았다. 소마가 다른 마약류와 다른 점은 문화적 배경과 그 쓰임새일 것이다. 인드라가 싸울 땐 소마가 힘을 주었다. 소마는 신들의 술로 제의에 사용되기도 했다.


소마가 가져다주는건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확장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달을 잡으려는 자가 찬드라 자신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자기(달)와 자기(찬드라) 사이의 심연에서 그는 많은 것들을 꺼내어 볼 수 있다.


달빛에 취하듯 소마에 취했을 때 사람들은 신도 되고 그동안 의식적으로 검열되고 억눌러야 했던 욕망 앞에서도 진솔해진다. 일상에서 벗어나, 인간에서 신으로 확장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욕망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욕망의 추한 이면은 밤의 어둠속에 가려지니까.


내 고민과 맞닿는 지점이 있어서인지 더 눈에 들어온 것 같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감정서가'에 갔다. 감정서가에는 감정들에 관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갔을 땐 좋아하는 자투리들을 모아 나만의 개성을 우려내는 티백 만들기 체험이 진행중이었다.



우리는 가위를 들고 거기 놓인 수많은 재료들을 잘라 각자 티백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반짝거리는 것들이 예뻤다. 내 안에서 뭔가를 우려낸다면 나는 뭘 선택할까. 생각나는대로 그냥 썼다. 사랑이 충만한, 다른 것 되기, 당당한. 내 안에서 그런 것들이 우러나면 좋겠다.


재밌어하는 나를 보면서 친구가 막 웃었다. 이런거 재밌어하는 니가 이상한거라고. 난 진짜 재밌었는데ㅜ 하긴, 이런 공작활동을 어색해하는 어른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다. 나에게는 어른의 가면이 아직 없는 건지도...



기억에 남는 문장을 쓰라는데 방금전 미술관을 나오면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지금 잘 가고 있는거 맞아?"


친구는 감정서가로 가는 길을 찾으면서 한 질문이었지만 내게는 순간 인생에 대한 질문으로 들렸다. 나, 지금 잘 가고 있는게 맞는걸까.


친구는 나에게 니가 가는 길이 맞다는 답장을 써주었다. 고마웠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내는 격려의 말들을 엽서에 적고 나눠가졌다.



그 다음에 간 곳은 여기, 용산 역사박물관이었다. 원래 병원이었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예전 병원의 구조를 살려놓은 느낌이었다. 입구에서 간단한 해설을 듣고 자유롭게 관람했다.



한강의 얼음을 떼어서 서빙고에 보관하기까지의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얼음조각같은 의자들도 놓여있었고 의자 바로 위 천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어서 빙고 체험을 제대로 했다. 그 당시 얼음덩어리 무게와 같은 물체를 직접 들어보는 체험도 있었다.



그 다음은 철도 체험이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영상을 보면 된다. 열차 창문밖 풍경처럼 영상이 스쳐지나간다. 편하게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사실 그때 머리가 울리는 듯한 두통이 좀 생겨서 걱정이 됐다. 혹시 그때 다친 부분 때문이 아닌가해서...



우리는 3층에 놓인 빈백에 좀 누워서 쉬었다. 누워서 눈을 감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누워있으니 높다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적이면서도 옛날 건물 느낌이었다. 병원이었을 땐 입원한 환자들이 이렇게 누워서 창문을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창문이 높은만큼 몸이 더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몸을 따라 의식도 반쯤 드러누웠다. 이완되는 시간이었다.


한참 쉬고 나서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 정원을 구경했다. 고층 빌딩들 사이의 구름이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고 친구가 그랬다. 자기가 이렇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사진 속의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아무 근심없이 웃고 있었다. 그때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이런게 휴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관람이 끝나고 시간이 약간 남아서 우리는 카페에 갔다. 그리고 미처 다 못했던, 하루를 같이 보내며 마음이 열려 비로소 생각난 이야기들을 나눴다.


친구를 질투하고 괴롭히는 나쁜 사람 이야기도 했고 (근데 친구를 가까이서 본 나는 그 사람이 왜 열등감을 느끼는지는 약간이나마 이해한다. 친구에게서는 항상 당당하고 따뜻한, 강한 에너지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사랑받고 자라 강하게 뿌리내린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누군가는 거기에 치인다고 느낄수도 있다.) 같이 욕도 해줬다.


하루의 분위기에 취한 나도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먹으면서 요즘 계속 불안해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인생에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걸까. 나이에 따라 그 나이에 이뤄야할 것들은 왜 있는건지. 나는 돌아가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선택한다는거, 책임진다는건 왜 이렇게 어렵고 두려운걸까.


밑그림 없는 캔버스에 물감 방울들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살고 있다. 친구도 나도. 이 작품이 아름답게 되어가고 있는지 망쳐지고 있는건 아닌지, 물감이 튀는걸 너무 두려워해서 손을 거둬들일 때가 많은건 아닌지...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어두운 껍질을 벗기고 아름다움을 비춰줄 달빛이 필요하다. 봐야할 것은 비춰주고 보지 않아도 되는건 가려주는 달빛이.


이렇게 휴가 첫째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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