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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03. 2023

오래된 갈비집, 3년만의 영성체

휴가 넷째날

넷째날은 가족과 함께 보냈다. 오래된 갈비집에 갔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정도 후각이 돌아왔었는데 다시 사라졌다. 초콜렛의 맛은 겨우 느끼는데 베이컨이나 갈비구이는 맛을 못느낀다. 왜 오락가락 하는걸까. 가족들에겐 걱정할까봐 이야기를 안했는데 혼자서만 이것저것 불안하고 신경쓰인다.



식후에는 팥빙수를 먹었고, 나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일단 어제 산 미사보가 불량품이라 바꿔야 했다. 레이스랑 망사 사이사이가 여러곳 어져있었다. 그리고 고해성사 후 첫 주일이었다. 영성체가 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여자만 미사보를 쓰는게 반페미니즘적인 행위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장소의 관행을 존중하는 편이고 무엇보다도 머리에 뭘 뒤집어쓰는걸 그냥 좋아한다. 예전에 춤 테라피를 할 때도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놀았다.

 

관습을 존중하면서도 내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었다. (자식은 부모의 집에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래서 미사보 색은 검정색으로 골랐다. 나한테 맞는 듯한 색으로. 표백제 흰색은 정말이지 나이가 들수록 소화가 안된다.


미사보를 교환하고 나와서 미사시간을 봤더니 4시부터였다. 한두시간 정도를 거기서 보내야 했다. 지하로 내려가서 얼쩡거리다 고가의 성물들이 많은 성물방에서 예쁜 꽃 모양의 십자가를 샀다. (견물생심...) 그 다음 스타벅스에 가서 녹차를 사고 잠깐 앉아있었다.


4시 즈음이 되어 성당으로 갔다. 전례를 많이 잊어버렸다. 그래도 최대한 따라하고 마침내 영성체를 했다. 영성체를 통해 내 몸은 성전이 되고,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게 됐다. 몰입한 결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고해소를 나오는 느낌...


그리고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당분간 고해성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에 안심도 됐다:) 이런게 고해성사의 효과 중 하나일까. 고해소에 가서 내 잘못들과 직면하느니 차라리 잘못을 안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고해를 마친 후부터 왠지 짜증이 나거나 화를 내고 싶어질 때는 꼭 고해소가 떠오른다.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에게 새로 산 십자가, 묵주팔찌의 축성을 구했다. 그동안 축성받지 않은채로 묵주를 쓰다보니 찜찜했는데 속이 시원해졌다.


이렇게 나는 종교로 돌아왔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수도 있다. 언젠가의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매일 미사를 봤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때의 나로부터 멀어져봤는데 딱히 즐거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성당에 다니든 안 다니든 언제나 하느님한테 불평이든 하소연이든 애원이든 하고 있었다. 가끔이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했고 성호를 그었다.


그게 신앙인지 습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늘 종교를 미뤄둔 숙제같이 느꼈고, 그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돌아왔고, 마음속 매듭이 하나 풀린 기분이다.


이날 저녁엔 휴가가 하루 남아서 슬프긴 했지만 잠은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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