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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08. 2023

월요일의 미술관

휴가 마지막날(1)

휴가 마지막날은 월요일이었다. 청명하고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다가 갑자기 장대비가 온 다음 습기에 찬 폭염이 덮쳐온, 이상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술관, 박물관이 닫는 날이기도 했다.


이날은 부모님과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집에서 쉬려다가 쫓기듯 나왔다. 생각해보니 날씨부터 개인사까지 다이내믹한 날이었다.


어딜 가야할지는 몰랐고 일단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탔다. 버스의 에어컨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찾아보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월요일에도 열었다. 근처에는 경복궁도, 안국동, 북촌 한옥마을, 삼청동도 있어서 볼건 많을 것 같았다.


지도를 찾아보다 내릴 정거장을 지나쳐버렸다. 그래도 마음은 여유로웠다. 시간이나 일정에 쫓기는 여행이 아니니까.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좀 돌아가는게 뭐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조계사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무슨 조선시대 벽보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1,000원이라고 써붙인 곳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나름 마음에 들어서 커피도 테이크아웃했다.



가다보니 우정총국(조선 후기 체신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우체국?) 건물이 있어서 잠깐 들러 구경했다. 그 당시 집배원들의 복장이 흥미로웠다.



도화서 터도 이렇게 보고... 예전엔 못느꼈는데 이렇게 터를 표시해둔게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의 공간(차로와 인도)으로 활용하면서도 과거를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맞닿은 공간같았다. (앗, 역사가 좋아지면 나이든 거라던데...)



안국동 길 입구에선 이렇게 비둘기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가까이서 사진을 찍는데도 도망가지 않아서 고마웠다.



빌딩숲과의 사이에 자연이 쳐놓은 듯한 녹색의 벽을 지나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도착했다. 사전에 '게임사회'라는 전시를 예약해두었다. 미술관에서 게임이라니... 사실 별 기대는 없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 간거였다.


근데 전시를 보면서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했다. 일단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라 작가들의 의도와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게임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세상의 끝), 의미없으면 탐색하거나 관찰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사람(NPC 등)과 물건(게임 내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풍경 등),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듯 하지만 결국 게임 제작자가 만든 규칙에 매여서 가능한 선택지 중에서밖에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지금 인지하는 현실 세계와 게임이 뭐가 다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나에게도 세상의 끝은 있다. 예를 들면 안가본 국가도 많고, 막히고 단절된 사람들, 선을 그어버리는 사건들을 만나 뚫지 못하고 되돌아온 적도 많다.


내가 평소에 흘려버리는 사람과 사물도 굉장히 많다. 우리 사무실 안에서 수십명의 직장 동료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자기만의 생각을 하는데, 그중에서 내가 알고있는건 별로 없다.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더하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소통할 필요가 있을 때만 말을 건네고, 대부분의 경우엔 흘려보낸다. 명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주위 풍경, 바닥의 자갈도 마찬가지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다 스쳐지나갈 뿐이다.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 것 같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선택지들은 한정되어 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항의한다, 침묵한다, 퇴사한다 같은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자리에서 음악을 틀고 다같이 춤을 추자고 권유하거나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프리허그를 하는 선택지는 없다. 가능은 하겠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엔 들어있지 않다.


가끔 창피하고 초라해서 한없이 작아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벽 뒤에 몸을 숨기거나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숨을 곳이 없는 장소에서 나를 위한 '나를 마셔요' 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쌀알만큼 작아질수도 없고, 벽 자체가 될 수도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보지 않거나 직면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 가질 뿐이다.


내 성격, 내 몸, 사회의 규칙, 물리학적인 법칙들, 나의 외부에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되는 상황과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현실의 제작자'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상들을 보면서 나는 게임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어른이 하면 좀 부끄러운(?), 시간낭비하는 엉뚱한 이 아니라 우리의 놀이이고 의 공간이라고.



전시를 경험하면서 나는 계속 그들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게임은 흑인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게임인데 이 세계에 들어오겠냐고.


게임을 경험하려면 그 세계가 지지하는 가치관에 동의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게임이 진짜 하나의 세계, 우리의 정체성부터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주는 서사라는걸 느꼈다.


흑인 트랜스젠더의 조상을 소환하고 deadnaming(트랜스젠더를 그들이 스스로 버린 원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의 의미를 인식하는 과정... 그리고 치유하는 의식이 있었다.


나는 치유자 조상을 선택하고,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는 치유의 온천에 들어갔다. 내가 개인적으로 잊고 싶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흑인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외부의 시선과 말들, 그로 인해 상처받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분야는 다르지만 나의 정체성에도 그런 상처들이 있다. 있어야 될 자리에 못있고 살아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을 잊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나는 가상의 공간(나의 뇌 안쪽)에서 그 기억, 그 상처를 찾아냈고 괴물과 맹렬하게 싸웠으며 이겼다. 게임에 몰입하는건 굿에 몰입하는 것과 비슷했다. 무속인이 강가에서 물을 떠내는 바가지에 익사자의 넋이 건져진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는 게임속 온천에서 치유되었고 악귀같은 기억을 찾아냈고 싸워서 물리쳤다. 그리고 현실의 나는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그렇게 게임이 끝났다. 나는 스스로 치유된 느낌이었고, 동시에 게임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흑인 트랜스젠더에 대해 마음이 좀 열렸다.


요 며칠 미술관을 다니면서 전시의 공간은 제의의 공간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의 조상들이 바쳤던 제물, 하나만 남기고 스러져갔다는 아홉마리의 삼족오(태양)들, 풍요의 왕을 떠받들다 희생시키는 의식, 이집트 신전에서 사제들이 신의 가면을 쓰고 신이 되어 수행했던 제의들...


그 신화들은 먼 과거의 것이 아니라 과학만능주의의 우리 사회에서 예술로 반복되고 변주되고 현재 진행형으로 경험되고 있는 원형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는 현재의 우리들도 일상에서 계속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한시간이면 다 볼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세시간이 지나있었다. 핸드폰 배터리도 25%라 충전이 필요했다. 근처 스타벅스에 갔고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 꿋꿋이 핸드폰을 충전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가 쏟아졌다. 경복궁을 가보려는 계획은 포기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한두시간 정도 머물다가 밖으로 나왔다. 오후 3시. 가야할 전시회는 저녁 7시에 마감된다고 한다. 적당하면서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인사동을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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