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마지막날은 밤까지 달렸다. 나도 모르게 휴가 초근을 찍고 있었다. 자기전에 내일 입고 갈 옷과 가방을 챙겨놓고 고민했다. 마지막날 밤에 해야될 일이 더 있나?
갑자기 '차곡차곡 키트'가 생각났다.
이건 꽤 오래전에 받았는데 손도 못대고 있었다. 레고라는 진입장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걸... 나무 모양으로 조립하라니...
거기다 나의 연대기를 쓴다는건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 과거를 편하게 돌아볼만큼 과거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진 않다.
이래저래 선뜻 손이 안갔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걸 안쓰면 누군가 다른 청년의 기회를 뺏는 잘못을 하는 거니까.
출근하게 되면 도저히 손을 못댈 것 같아서 마지막 휴가날 밤 9시쯤 드디어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한시간 반 정도 걸쳐서 만든게 이 나무다.
이걸 만들면서 나는 내가 그동안 나답게 잘 살아왔다는걸 느꼈다.
설명서를 보고,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하고, 잘 안되면 다시 뜯어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들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못된다.
설명서를 한번 보고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된 나는 설명서를 던져두고 내 마음대로 조립을 시작했다.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은 필요없었다. 뭐가 됐든 내가 만든건 다 작품이고 나에게 소중하니까. 재조립하는 일도 없었다. 성격상 나는 느낌대로, 한번에 나아갔다.
중간에 한번 위기가 있었다. 꽃을 달아놓은 큰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다. 나는 조금 지친 상태였고 가지는 쉽사리 제자리에 붙지 않았다. 나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기로 했다. 꽃이 핀 가지를 울타리에 심었다. 보통 울타리는 죽은 나무로 만들지만 내 울타리는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꽃까지 흐드러지게 피운.
그런데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획성이 떨어지고 느낌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계획성이 필요한 분야에선 좀 쩔쩔매는 편이다. 마음 설레지 않는 일은 잘 못한다.
대신 나에게는 감정, 직관, 그리고 마음이 있다. 나는 나를 믿고 내 마음이 원하는 방향대로 따라가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퍽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나는 중간에 날개가 부러졌고 다시 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날 필요가 꼭 있었나 싶다. 내가 원하는게 아니라 남이 원하는걸 물어다주려고 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삶이 행복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죽은 나무 울타리에 꽃이 피는 것처럼, 죽을뻔한 위기, 죽은거나 다름없는 삶에서 이렇게 꽃을 피웠다.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나무 전체에 나는 가능한 모든 꽃들을 다 달아주려고 했다. 내 인생에 앞으로도 저렇게 많은 즐거움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긍정하는 마음에서.
꽃으로 가득찬 나무는 너무 여백의 미가 없어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내 삶이 그렇게 꽉 차고 예쁘게 피었다고 느껴져서 가득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