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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11. 2023

초록 잎은 무성하고 붉은 꽃은 떨어지다

녹비홍수


여몽령(이청조)


어젯밤 비는 드문드문,  바람은 세차더니

깊은 잠에도 술기운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주렴 걷는 이에게 물었더

해당화는 전과 같다고 하네.


아는가? 아는가?

초록 잎은 무성하지 붉은 꽃은 떨어졌을 것을.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중국 송대의 시인 이청조의 '여몽령(꿈결같다는 뜻)'이라는 시이다. 마지막 네 글자, '녹비홍수(초록 잎은 무성해지고 붉은 꽃은 시든다)'라는 말은 같은 제목의 중드로도 유명하다.


한 구절 안에 긍정과 아쉬움이 조화롭게 들어있다. 붉은 꽃이 떨어진다는건 해당화의 안부를 물어본 화자에게는 아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록 잎이 무성해지는게 나쁜 의미는 아니다. 둘은 같은 해당화이고 계절이 다를 뿐이니.


한 계절이 지나가면 다음 계절이 다가온다. 꽃이 지면 잎은 무성해지고 그 다음 해를 기약한다.


비바람에 흩어진 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꽃들이 떨어지는 시기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빗방울을 머금어 한층 진해지고 무성해진 녹색 잎들이 남아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것처럼.


꽃이 없다고 해서 해당화가 아닌건 아니다. 꽃이 떨어지고 남은 잎들은 해당화 아닌 해당화로 다음 개화기까지 아름답게 살아낸다.


어쩌면 나는 지금 초록 잎의 계절을 살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꽃은 비바람에 떨어졌지만, 대신 무성한 잎이 한가득 자라났다. 나는 지금의 계절에 만족한다. 그러다 꽃의 계절을 기다려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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