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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18. 2023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느 키워드에 답장을 달아본다.


죽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리는  그대로다. 수만가지 마음 중에 죽고싶은 마음이 내 마음의 무대 위로 올라왔다는 뜻이다. (마음의 무대라는건 지금 내가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을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화자는 죽고싶은 마음이 아니라 무대 밑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살고싶은 마음이다. 그 살고싶은 마음이 보내는 구조 신호가 바로 죽고싶다는 말이다.


죽고싶은 마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살에 도달해야 되기 때문에 오히려 밝게 웃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그렇게 여러가지 마음들이 우리의 마음의 무대 위를 차지하려고 서로 밀치고 다투고 올라가려고 한다. 하나의 확고한 마음이라는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자살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높은 낭떠러지 옆을 걷다보면 밧줄을 꽉 붙잡고 조심해서 걸어가게 된다. (어느 눈 오는 날 미끄러운 백운대 뒷길을 지나가던 내 이야기다... 안개가 자욱한 노적봉과 바닥이 안보이는 낭떠러지길은 진짜 무서웠다.)


그건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이 거짓인게 아니라 살고싶은 마음이 무대 위로 올라왔을 뿐이다. 보통 주위 사람들에겐 죽고 싶다는거 관심 끌려고 거짓말 한거 아니냐고 보이는 행동일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싸움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그러다 최후의 한방울이 떨어져 물이 넘치게 되는 순간, 죽음 51: 삶 49의 순간, 그게 바로 자살이다.


정말 한끗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죽기 전에 전화해서 울기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정말 팽팽하게 50:50인 상황이다. 살고싶은 마음은 구조 신호를 보내려고 전화를 건다. 그런데 죽고싶은 마음과 절망하는 마음은 자살을 방해받는게 두려워서 뒤에서 입을 틀어막는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은 울음소리밖에 없다...


주위에 죽고싶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실 힘들긴 하다. 나는 일일이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정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힘들겠다고 위로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마음을 거짓말이라고 비아냥거리거나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실된 태도로 인정만 해주면 된다. 그 사람 안에 죽고싶다는 마음이 지금 있다는걸.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걸. 그리고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때가 있다는걸.


"그렇구나. 니가 그렇게 느낄만한 일이 있었겠지. 죽고싶은 기분이 드는거 이해돼. 힘들었겠다."


믿어주고 인정해주면 50:50이 되고, 밥이라도 한끼 같이 먹어주면 49:51이 될 수도 있다. 잠깐 다른데 몰입할 수 있도록 영화관에서 스릴 넘치는 영화까지 같이 봐주면 40:60이 될지도 모른다. 왜 자살하려고 생각했는지는 그 후에, 마음이 좀 열린 후에 물어봐도 늦지 않는다.


그런데 죽고싶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막 화를 내고, 관종이라고 비웃고, 농담한다고 웃어버리고, 갑자기 심각해져서 환자 취급하고, 울고, 손 붙들고 기도하고, 왜 죽고 싶은건지 수사하듯이 꼬치꼬치 캐묻고, 무조건 병원 가라고 등떠미는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족이라면 어느정도 심각하고 단호하게 개입하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위의 반응이 그러면 창피하기도 하고, 다음번엔 티 안나게 시도해야겠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나 어제 죽고 싶었어."라는 말을 들어도 침착하게, "나 어제 막걸리랑 해물파전 먹었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 ("그래, 힘든 일 있었나보네. 자살하고 싶었구나... 니가 그럴 정도면 이유가 있겠지. 고생많았어. 배고프지 않아? 우리 밥 먹으러 갈래?") 50을 넘어서던 죽음의 감정이 조금씩 내려온다. 불을 끄는 소방관의 역할과 비슷하다.


그런 말을 듣는 상대방은 무대 아래에 있는 살고싶은 마음이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대화를 접하면 살고싶은 마음은 주도권을 잡고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 아닌 것처럼, 다시 일상의 습관 속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러다 얼떨결에 정말 돌아와버리기도 한다.


실컷 울고 그날 저녁에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그래도 친구랑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고 일기장에 쓸지도 모른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도, 우울증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한번 막아도, 그 사람은 매일 매일 반복해서 자살사고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무대를 생각해보면, 어쩌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그 한두번의 기회만이라도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살려놓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매일 그 무대에서 싸움을 하고 있다. 자살 예방을 위한 최고의 노력은 당사자가 하고 있다. 그러다 정말 못버티겠을 때 구조신호를 보낸다. 그 한두번의 순간에 살고싶은 마음에게 잠시 숨통을 틔워주면, 살고싶은 마음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물론 나는 전문가는 아니니 이건 전부 개인적인 생각일뿐이다. 나한테 한해서는 효과가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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