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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Aug 28. 2023

전시회, 기분전환

인간에게 예술이 갖는 의미 중에는 '전환'이라는게 있지 않을까. 기분전환, 그리고 존재의 전환.


미구엘 슈발리에의 '디지털 뷰티 시즌2'는 단단한 일상과 자아에서 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처음에는 무기력하고 지쳐서 안가고 싶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뇌에 뭔가를 입력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전환이 조금이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정말 딱 맞는 전시회였다.


디지털 뷰티 시즌2 중에서(내 움직임이 만든 모습)

일단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의미를 찾거나 고민할 거리는 거의 없었다. 설명도 필요없이 그저 직관적으로 느끼면 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처음 들어갔을 땐 적응이 잘 안됐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선들, 그래픽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매모호했고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다. 어둠속에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면서 지하 4층의 전시까지 본 다음 다시 올라왔을 때, 그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전시는 함께 만드는 전시였다. 층마다 관람객들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스크린들이 있었다. 물론 틀 자체는 작가의 의도와 구상에서 나온 거지만 관람객들도 자신의 의도를 갖고 스스로 붓과 물감이 되어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내 몸, 나의 움직임으로 그림을 만들어가다보니 금방 전시에 몰입되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전시장 전체를 혼자 관람했던 것도 몰입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나는 전시가 내 외부의 세계, 그리고 내부를 가득 담고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움직임, 살아 움직이는 사회, 그것들이 집적된 역사... 동시에 내 안의 세포들, 생명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맞닿은 채 터질듯이 팽팽한 두 세계 사이에 '나'라는 껍질이 있었다.


디지털 뷰티 시즌2 중에서(내 움직임이 만든 모습)


어둠속에서 나는 나의 경계나 모습을 잘 느낄 수 없었다. 내 모습은 스크린에서 물감의 파도같은 모습도 되고, 고정된 점에 묶인 선들이 되기도 하고, 결합되고 분리되는 세포들이 되면서 계속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라는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포들의 집합체. 내 몸은 다른 사람들의 몸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몸들을 가진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사회가 만들어지고 지구를 덮고...


그리고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인과의 그물을 만들어낸다. 나는 수많은 선택지를 가진 것 같지만 결국 그 그물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아주 멀리서 본다면 그중 하나인 내가 하나의 세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에게 아주 의미있는 것들, 나라는 생명이 먼 거리에선 계절의 변화처럼 피어나고 스러지는 작은 점으로 보인다.


안과 밖은 모두 다른 사람, 사물과 연결되어있는데 나는 평소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나에겐 '나'라는 껍질만 보인다. 나에게 내 몸, 내 인생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있다. 내가 애착을 느끼는 그 껍질과 안팎의 두 세계를 느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가 느낀건 그랬다)


처음 다 봤을 때의 느낌과 두번째, 세번째 봤을 때의 느낌이 조금씩 달랐다. 정말 좋았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 어느날에, 휴가 쓰고 훌쩍 와버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울한 사람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이런 전시회 티켓 한장일지도 모른다. 작품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몰입되고, 기분이든 무엇이든 잠시 전환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햇빛 쨍한 바깥으로 나올 때 지친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잘 살아봐야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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