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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Sep 12. 2023

'의도' 내려놓기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기획한 아트퍼스트 시즌 2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번에 '차곡차곡 키트'의 후기를 남긴 것이 계기가 되어 초대를 받게 되었다.


아트퍼스트는 문화예술을 통한 청년들의 마음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나는 그 중에서 '재료와 나'라는 미술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사실 굉장히 망설였다. 안하고 싶은 생각이 90%였다. 요즘 몸도 안좋고 너무 피곤하기도 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내가 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림은 집에서도 그릴 수 있는건데... 나에게 마음치유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나한텐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약이 있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론은 피곤해서였던 것 같다. 몸이 힘드니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했다. 첫 회차는 일이 있어서 빠졌는데 두번째 회차는 가야만 했다. 이번에 안가면 아예 안나가게 될 것 같았고, 소중한 후원금으로 진행되는 수업이니 빠지지 말아달라는 문자가 마음을 움직였다.


길치답게 한참 헤매고 난 다음에야 장소를 찾았다. 그곳에는 낯설지만 환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마음의 부담감이 남아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용히 수업에 참여했다.


이번 회차의 주제는 '의도를 내려놓기'였다. 특정한 주제 없이 알콜과 잉크를 떨어뜨리고 흐르게 하면서 뭔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다 '의도'이긴 했다. 어떤 색의 잉크를 어디에 떨어뜨릴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지, 여백을 남길지 말지 등등. 다만 가장 중요한 '주제'에 관한 의도는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잉크들을 떨어뜨리고 물멍을 했다. 그러다보니 이런 모습이 되었다.



완성된 모습은 포도알이 가득한 비밀의 정원같은 느낌이었다. 자라나는 포도알과 잎들, 으깨지는 여름의 느낌.


색채와 물멍은 뜻밖에 내 피로감을 해소시켜 주었다. 마음이 엄청 편해졌고 여기 오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즐거움과 평화로움이 두번째 작업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의도를 내려놓는다는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평소에 나는 얼마나 많은 의도들에 속박된 채로 살고있는 걸까. 나의 의도들, 나에 대한 타인의 의도들... 어쩌면 나는 매일, 이런 칼날같은 의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사이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머리가 무겁다. 어느 의도에 베일까 두려워하고, 타인의 의도를 몰라 불안해하고, 나는 어떤 의도를 가져야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막막하고... 생각해보니 그게 요즘의 내 일상이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이것저것 번잡하게 얽혀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해결된건 아무것도 없지만, 알콜과 함께 퍼져가는 색채들이 내 생각 뭉치를 끌어내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래서 잠시나마 머릿속이 텅 비었고 쉴 수 있었다. 새하얀 공간 위에서 나는 의도 없는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 나는 가벼워져 있었고 기운이 났다. 다음 시간도 기대가 된다. 수업과 겹칠지도 모르는 스케쥴 두개가 있는데 조정을 해야겠다. 수업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걸로...


그리고 약간의 반성을 하게 됐다. 요즘 내가 너무 약에만 의지하고, 나를 돌보는 다른 방법들에 소홀했다는걸.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돌봄들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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