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Oct 14. 2023

가방을 고르는 방법

나다운 것

가방에 관심이 별로 없고 가죽 제품은 안좋아해서(어릴때부터 가죽의 촉감같은걸 좀 안좋아했다) 원래는 에코백만 갖고 다니는 편이다. 그러다 최근에 정장에 메고 다닐 가방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방을 몇개 구입하게 됐다.


가방을 고르다보니 내가 예전보다 내 취향을 훨씬 잘 알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냥 예뻐보이는거 아무거나가 아니라 나한테 맞는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를 내가 알고 있다는게 좀 신기했다. (우울증이 한창 심할 땐 이런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서...)


내가 가방을 고르는 기준은 이랬다.


1. 보부상 가방일 것

정리가 안되고 계획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걸 가방에 넣고 그때그때 뒤져서 필요한걸 찾는 편이다. 비 온다고 한 날 가방에 우산을 넣어놓고는 며칠씩 우산과 함께 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가방은 큰게 좋다.

(이런 습관을 좀 고쳐보려고 미니백도 샀지만)


2. 가벼울 것

가방에 항상 많은 물건들이 들어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꽤 무겁기 때문에 가방이라도 가벼워야 어깨가 안아프다. 캔버스천이 제일 좋긴 한데 요즘 비건 레더 제품들도 가벼워서 좋았다.


3. 저렴할 것

물건에 애착을 갖고 오래 쓰는 편이긴 한데 관리는 잘 못한다. 가방에 볼펜 자국을 만들거나 손소독제를 떨어뜨리거나 물약 위에 무거운 책을 넣어서 가방 속에서 물약이 터지거나... 내가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실수들이 꼭 생긴다. (이건 ADHD라 그렇기도 하다) 그럴 때 마음 안아프려면 저렴한게 좋은 것 같다.


4. 불편하지 않을 것

아무리 예뻐도 열고 닫는게 불편하면 손이 안간다. 급하게 지갑을 꺼내야 할 때 가방이 안 열리면, 다소 충동적인 ADHD들은 짜증나서 가방을 내팽개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도 있다. 가방이 제대로 안닫혀서 속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걸 주우려고 생각없이 몸을 기울였다가 손에 든 커피를 쏟고, 간신히 다 줍고 일어나다가 난간에 머리를 부딪히는 일... 아주 아주 가끔은 일어나는 일이다. (왜 나는 저 일들을 한번에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아무튼, 그래서 빠르고 편하게 잘 열리고 닫히는 가방이라야 한다.


5. 대충 어떤 옷에도 어울릴 것

나는 무난한 색의 가방들을 선호한다. 옷과 가방의 색조합이 귀찮기 때문이다. 전날 자기 전에 옷과 목걸이를 미리 고르는 것만해도 비계획적인 나에겐 큰 일거리인데 거기에 가방까지 더해지 조금은 부담스럽다. 이번에도 예쁜 핑크색 가방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평소 입는 내 옷 색들을 떠올려보고 결국은 삭제하고 말았다.





이번에 가방을 고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이즈, 어떤 디자인, 어떤 소재의 가방을 선호하는지, 나에게 가방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


나다움이라는게 이런걸까? 나다움이라는건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다운게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가방 선택'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나다움을 떠올리기가 그닥 어렵지 않다. 여기서의 나는 덤벙대고 실수도 많이 하는, 그리고 까다롭기보단 편안하고 여유로운걸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듬성듬성한 내 정신상태를 인정해주고 거기에 맞는 가방을 골라주는 센스도 있다. 나한테는 나름 괜찮은 나같다.


가방을 사다가 문득 나다움에 대한 잡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잡생각은 다음달 카드값을 잊어버리기 위한 뇌의 노력인지도 모른다. 잠깐 골랐을 뿐인데 어느새 다섯개의 택배가 집에 도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의 빈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