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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Oct 15. 2023

비 오는 어느날의 정신과

마음은 흐림

밀크티 맛도 흐림이었다

우산을 챙겨서 병원에 다녀왔다. 비가 많이 오진 않았고 흐리기만 했다. 요즘 내 감정상태와 똑같은 날씨이다.


우울하고 슬프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즘 나는 감정기복 없이 차분하고, 뭘 해도 엄청 즐겁지도, 엄청 슬프지도 않다. 항상 중간쯤에서 일정한 마음이 유지된다. 탄력성 없는 고무줄같다랄까.


진료실에 들어가서 요즘 어떻냐는 질문을 듣자 그냥 아무 생각도 안났다. "별거 없는데요."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이상해졌다. 별거 많았는데. 그런데 기억도 잘 안나고 감정도 잠깐 튀어오르다 결국 '흐림'에 수렴하고 만다.


어쩌면 사건들에 강렬한 감정이 수반되지 않았기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건 자체보다 그 순간 느낀 감정들을 주로 기억하는걸까.


이런 상태를 이야기하자 원래 이게 ADHD약의 효과라는 설명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태를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느낀다고. 대신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기에 확 다운되거나 슬프거나 한건 없다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 약을 먹은 이후로는 들뜨거나 신나거나 막 즐거운 그런게 없어서 답답하고 재미가 없다. 감성 터지는 순간도 없고 살아서 행복하다는 희열감도 없다. 긴장하거나 흥분하는 일도 거의 없다.


화도 잘 안나고 자존심도 잘 안상한다. 생각과 감정이 동행하지 않는다. 얼마전엔 성적으로 약간 선 넘는 말을 들었는데도 화가 안났다. 머리로는 짜증이 나고 경계심이 들었는데 감정은 차분했다. 며칠간 곱씹어보면서 지금 상태는  문제가 다고 판단했다. 


내가 느껴야할(?), 원래 같으면 느꼈을 감정들을 못 느끼는게... 이게 맞는건지.


계속 고민중이다. 이게 정말 정상일까? 이게 정상이라고 해도... 그냥 내가 생긴대로 사는게 더 재밌지 않을까?


하지만 우울증도 두렵고, 불안도 두렵고, 대학원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집중이 안돼서 예전처럼 망하는 것도 두렵고, 식욕 억제가 안돼서 다시 살찌는 것도 두렵다.


용기가 없다.


여전히 고민만 하다가 진료실에서는 만족한다고만 말하고 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74,700원을 내고 한달치 '흐림'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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